김질 (1422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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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질'''(金礩, [[1422년]] ~ [[1478년]] [[2월 24일]])은 [[조선]]시대 전기의 무신, 문신, 정치인이다. [[음서사육신]] 무관이 되고, 그뒤함께 [[1447년]]단종 [[생원시복위 운동]]에 2등으로참여했으나 합격했으며실패를 [[1450년]](문종예상하고 즉위년)이를 문과에고변하였다. 급제하여자(字)는 집현전 수찬가안(可安), 사간원호는 우정언쌍곡(雙谷), 성균관시호는 사예 등을 거쳐 [[1455년]] [[성삼문]]'''문정'''(成三問)·[[박팽년]](朴彭年文靖). 등과 함께본관은 [[단종안동 복위 운동]]에 가담했다가 뜻을 바꾸어 [[조선 세조김씨|세조]]에게(구) 사육신의 거사를 알렸으며 이 공로로 [[좌익공신안동]](佐翼功臣) 3등과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고 뒤에 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이다.
 
[[음서]]로 무관이 되고, 부사직(副司直)에 이르렀을 때 사가독서(賜暇讀書)를 청원하여, 특별히 허락받았다. 그뒤 [[1447년]] [[생원시]]에 2등으로 합격했으며 [[1450년]](문종 즉위년)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수찬, 사간원 우정언, 성균관 사예 등을 거쳐 [[1455년]]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했다가 여러 번 기회를 놓치고 위험을 느끼게 되자, 뜻을 바꾸어 [[조선 세조|세조]]에게 사육신의 거사를 알렸으며 이 공로로 군기감판사(軍器監判事)가 되고,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과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고 뒤에 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관직은 [[의정부]][[좌의정]]에 이르렀고, [[조선 성종|성종]] 초에 〈경국대전〉의 편참에 참여하였다. 고려의 장군 충렬공 [[김방경]]의 후손으로, [[개국공신]] 익원공 [[김사형]]의 증손자이자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정창손]]의 사위이다. 또한 [[강희맹]]의 사돈으로 [[강희맹]]의 딸은 그의 아들 [[김성동 (1452년)|김성동]]과 결혼했다.
 
그뒤 [[평안도]][[관찰사]], [[공조판서]], [[병조판서]], [[우참찬]], [[경상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1468년]] [[우의정]], [[좌의정]]이 되었다. [[1468년]] [[세조]]의 사망과 [[1469년]] [[예종]]의 사망 당시에는 [[원상]]의 한사람으로 정무를 처결하였다. 그 뒤 [[조선 성종|자을산군 혈]]을 지지하고, [[조선 성종|성종]] 즉위 직후에는 왕족 [[귀성군]]을 숙청하였다.
[[조선 세조|세조]] 사후 [[영의정]] [[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원상(院相)세력을 형성하였으며, [[원상제]]의 전범이 되었다. 낙풍부원군 [[김자점]]의 5대 선조이며 백범 [[김구]]의 20대 방조에 해당된다. 자(字)는 가안(可安), 호는 쌍곡(雙谷), 시호는 '''문정'''(文靖). 본관은 [[안동 김씨|(구)안동]].
 
관직은 [[의정부]][[좌의정]]에 이르렀고, [[조선 성종|성종]] 초에 〈경국대전〉의 편참에 참여하였다. 고려의 장군 충렬공 [[김방경]]의 후손으로, [[개국공신]] 익원공 [[김사형]]의 증손자이자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정창손]]의 사위이다. 또한 [[강희맹]]의 사돈으로 [[강희맹]]의 딸은 그의 아들 [[김성동 (1452년)|김성동]]과 결혼했다. [[조선 세조|세조]] 사후 [[영의정]] [[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원상(院相)세력을 형성하였으며, [[원상제]]의 전범이 되었다. 낙풍부원군 [[김자점]]의 5대 선조이며 백범 [[김구]]의 20대 방조에 해당된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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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정창손]]의 딸 정씨와 결혼하였다.
 
=== 청년 시절 ===
[[1450년]] 추장[[문과]]에 응시하여 정과로 급제, 바로 [[성균관]]주부가 되었다.
음보로 출사하여 [[충의위]](忠義衛)가 되었으며 그뒤 여러 벼슬을 거쳐 [[충의위]] 부사직(副司直)에 이르렀을 때 사가독서(賜暇讀書)를 청원했다가, 특별히 허락받았다. 그는 과거 급제자가 아닌데도 참상관의 자격으로 사가독서를 청하여 [[세종대왕]]이 이를 허락했다. 그가 과거 급제자가 아닌데도 사가독서를 한 일은 후일 성균관에서 참상관의 수학제도의 전례가 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추장[[문과]]에 응시하여 정과로 급제, 바로 [[성균관]]주부가 되었다. 그 뒤 집현전 학사가 되었으며, 사간원우정언, 병조좌랑을 지내며 [[집현전] 학사를 겸임하였다. 김질은 글씨를 잘 썼고 고전에 능하였으며 지식이 해박하였다. 그 무렵 [[성삼문]](成三問), [[박팽년]], 최항(崔恒), [[신숙주]](申叔舟) 등 몇몇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문종]]의 각별한 사랑과 총애를 받았다.
 
=== 관료 생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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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2|김질(金礩), 김명중(金命中), 정수충(鄭守忠) 등이 비록 6품으로서 정 4품의 직사(職事)를 제수받았으나, 신이 모두 교지를 받아 제수한 것이니, 헌부(憲府)에서 비록 서관(庶官) 을 규찰(糾察)하고, 신이 또한 교지를 받들어 백료(百寮) 를 규찰한다 하여도, 어찌 그 사이에 사사로운 뜻이 있겠습니까?<ref name="dan122"/>}}
 
이후 그는 [[조선 세조|수양대군]]의 심복이 되어 활약하였다. [[1455년]](세조 1년)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가 되었다.
 
사정전(思政殿)의 정사를 마친 뒤 술좌석에 참석하였다. 이때 집의(執義) 이예(李芮)가 술이 취하여 어탑(御榻)으로 올라가 [[당나라]] [[당 태종|태종]](唐太宗)의 고사(故事)를 끌어서 [[금성대군]] 이유(李瑜) 등의 죄를 강력히 청하자 이를 불쾌하게 여긴 [[조선 세조|세조]]는 김질과 한계미(韓繼美), 박수미(朴壽彌), 김석제(金石梯)에게 술을 남용했다는 이유로 파면하였다.<ref>세조실록 2권, 세조 1년(1455 을해 / 명 경태(景泰) 6년) 11월 20일(신묘) 1번째기사 "술자리에서 집의 이예가 취하여 어탑에 올라가 이유 등의 죄를 청하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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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8년]] [[1월]] [[우승지]], [[3월]] [[우부승지]], [[10월]] [[좌부승지]], [[1459년]] [[3월]] [[좌승지]], 그해 [[4월]] 우승지가 되었다. [[4월]] 우승지로 [[명나라]]에서 파견된 사신을 인견하였다.
 
[[1459년]] [[4월]] 왕명으로 선물인 연회에 쓰이는 탁자들을 2품 이상의 대신들에게 나누어주었다.<ref>세조실록 16권, 세조 5년(1459 기묘 / 명 천순(天順) 3년) 4월 12일(계해) 2번째기사 "연탁을 종2품 이상의 문관과 무관에게 내리다"</ref>, 그해 [[6월]] 다시 좌승지가 되었다. 그해 [[7월]]에는 대신들과 함께 군정의 점고를 의논하였다.<ref>세조실록 17권, 세조 5년(1459 기묘 / 명 천순(天順) 3년) 7월 2일(신사) 1번째기사 "강맹경 등과 군정의 점고를 의논하고, 이계전·김연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ref> 그는 변방을 약탈하는 [[여진족]]에 대한 강경 대응을 건의하는 한편 북방에 성곽을 쌓고 정병을 파견하여 미구에 있을 [[여진족]]의 침략에 대비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또한 삼남의 남해안, 동해안에도 병력을 배치하고 성곽을 개보수하여 왜구의 침입과 노략질에 방비할 것을 건의하였다.
 
==== 국방, 군사 활동 ====
[[1459년]] [[8월]] [[병조]][[참판]] 상락군(上洛君)이 되어 [[조선 세조|세조]]의 국방정책 수립에 참여하고 그뒤 다시 상락군(上洛君)에 봉하여졌다. 그해 [[12월]] [[이조판서]] [[구치관]]·[[예조판서]] [[홍윤성]]과 함께 무경(武經)과 병서(兵書), 진법 등을 강론하였다.
 
[[1460년]] [[한명회]]의 처가 병이 들자 그와 임무를 교체하라는 명을 받았다.<ref>세조실록 19권, 세조 6년(1460 경진 / 명 천순(天順) 4년) 2월 10일(정사) 2번째기사 "서북면 도체찰사 한명회에게 처의 병을 알리고 상경할 것을 유시하다"</ref>
 
그해 [[2월]] [[평안도]]와 [[황해도]]의 도순찰사를 겸직하여 파견되었다.<ref>세조실록 19권, 세조 6년(1460 경진 / 명 천순(天順) 4년) 2월 10일(정사) 3번째기사 "평안 황해도 도순찰사 김질이 하직하니 물건을 내려 주다"</ref> 이어 [[함경도]]의 도순찰사를 겸하고 서북면 도체찰사가 되어, 서북면 도체찰사 겸 평안, 황해, 함경도 순찰사가 되어 부임하였다. 그 해, [[세조]]의 서쪽지방 순행 시 도체찰사 겸 평안, 황해도 도순찰사로 세조의 서북 지방 순찰을 수행하였다.
그는 [[조선 세조|세조]]의 병력 증강책의 추진에 앞장섰으며 그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군적 순찰사(軍籍巡察使)가 되어 병역을 면제받거나 회피하는 양반과 평민들을 단속하여 군역을 부과했다. 양반이나 평민 면제자에게 군역을 부과하려는 세조의 뜻을 잘 받들고 군액(軍額)과 병력 충원에 힘써서, 한산(閑散)한 문무과(文武科) 출신과 생원(生員)·진사(進士)들도 모두 군역에 편입하였으며, 비록 심한 폐질이 있는 자라도 혹 면제되지 못하는 수가 있었는데, 그의 종사관(從事官) 양진손(梁震孫)은 더욱 각박하였으므로, 사관이 그의 졸기에 논하기를 이 때문에 "원망이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ref name="seong09"/>"고 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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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료 생활 ====
[[1460년]](세조 6년) 세조가 두 차례에 걸쳐 서도(西道)지역 순행(巡幸)을 하자, 그는 왕의 서도 순시를 위해 특별히 [[황해도]][[도순찰사]]와 [[평안도]]도순찰사가 되고, 그해 [[7월]] 다시 [[병조]][[참판]]이 되었다. [[1461년]] [[1월]] 다시 [[평안도]][[도순찰사]] 겸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가 [[2월]] 다시 [[병조]][[참판]]이 되었다. 그해 [[5월]]에 [[평안도]] [[도관찰사]]로 나갔다.
 
[[1463년]] [[3월]] [[공조]][[판서]]로 승진하고 이후 병조판서·형조판서를 거쳐 [[11월]] 도진무(都鎭撫)가 되었다가 다시 [[형조]][[판서]]가 되었다. [[1464년]] [[2월]] 우상 대장(右廂大將), [[3월]] 다시 형조판서가 되었다.
 
[[1464년]] [[8월]] 도진무(都鎭撫), [[9월]] 형조판서, [[1465년]] [[4월]] 다시 병조판서, [[1466년]] [[의정부]] [[우참찬]] 등을 지내고 숭정 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였다. [[1467년]] 행 좌참찬(行左參贊)이 되었다가 그해 [[7월]] 겸 의금부 판사(兼義禁府判事)를 겸임하였다. 그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1468년경상도]] 다시 상락군에 봉해진 뒤 [[조선 예종|예종관찰사]] 즉위하자되었다. [[의정부]] [[우의정]]에 발탁 되었으며 [[조선 세조|세조]]의 능침을 정하는 산릉 도감 제조(右議政山陵都監提調)를 겸임하였다.
 
[[1468년]](세조 14년) 다시 상락군에 봉해진 뒤 [[조선 예종|예종]]이 즉위하자 [[의정부]] [[우의정]]에 발탁 되었으며 [[조선 세조|세조]]의 능침을 정하는 산릉 도감 제조(右議政山陵都監提調)를 겸임하였다.
겸 경연 영사(兼經筵領事)를 겸하다가 곧 [[좌의정]]으로 승진했다. 이어 상락군에서 상락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그뒤 겸 경연 영사(兼經筵領事)를 겸하다가 곧 [[좌의정]]으로 승진했다. 이어 상락군에서 상락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이때 [[세종대왕]]의 능침을 이장할 때 천릉 도감 제조(左議政遷陵都監提調)의 한사람으로 선발되었고, [[1469년]] [[1월]] 평안도 도체찰사(左議政平安道都體察使)로 다시 부임하였다. 그해 [[2월]] 다시 좌의정(右議政)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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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 [[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원상(院相)으로서 서정을 주관하였다. 이들 원상세력과 함께 나이 어린 예종과 성종 초기에 국정서무를 주관하여 권력공백기의 혼란을 차단하였으나, [[조선 예종|예종]] 말년 [[조선 성종|자을산군]]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왕족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을 제거하고 [[조선 성종|자을산군]]의 즉위를 지지하였다.
 
=== 말년생애 후반 ===
==== 서적 편찬 활동 ====
[[1469년]] 성종 즉위후 경연청영사(經筵廳領事)에 임명되고, [[1470년]] 사옹원 제조(司饔院提調)가 되었다.
한편 그는 영의정 [[한명회]](韓明澮), [[신숙주]] 등과 함께 원상 세력을 형성하여 왕실을 견제하였다. [[1469년]] 성종 즉위후 경연청영사(經筵廳領事)에 임명되고, [[1470년]] 사옹원 제조(司饔院提調)가 되었다. 그 뒤 정치적 영향력이 큰 구성군 준(龜城君 浚)을 공격, 숙청하였다.
 
[[1471년]]에는 성종의 즉위를 도운 [[좌리공신]]을 서훈할 때 좌리공신 2등으로2등(佐理功臣2等)으로 서훈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졌다. [[조선 성종|성종]] 때는 《고려사절요》의 증보 편집, 《경국대전》의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다.
 
세조의 공신으로 특히 세조의 병제개편에 깊이 관여하였으며, 성종 초반, 관료들이 사적으로 보유한 사노비들의 수를 점검하게 하여 이를 감시, 사병을 형성하는 것을 방지하게 했다. [[1472년]]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이 되었다.
[[1471년]]에는 성종의 즉위를 도운 [[좌리공신]]을 서훈할 때 좌리공신 2등으로 서훈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졌다. [[조선 성종|성종]] 때는 《고려사절요》의 증보 편집, 《경국대전》의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다.
 
==== 최후 ====
[[1472년]]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이 되었다.
[[1473년]] 다시 사옹원 도제조(司饔院都提調)가 되었다가 [[1474년]] 소환되어 [[의정부]][[우의정]]에 재임명되었다.
 
[[1473년]]글을 다시 사옹원 도제조(司饔院都提調)가 되었다가썼으므로 [[1474년]] 소환되어 [[의정부]][[우의정]]에 재임명되었으며, 글을 잘 썼으므로우의정으로 [[명나라]]에 [[조선 덕종|의경세자]]를 왕으로 추존하면서 시호를 얻으러 파견되는 주문사(奏聞使)에 임명되어 [[북경]]에 다녀왔다. 의경왕(懿敬王)의 시호를 허락을 받아가지고 돌아오니, [[조선 성종|성종]]은 특별히 상으로 그에게 토지와 노비를 내렸다. 법률 개정에도 참여하여 [[1465년]]에 병전(兵典)을 고열(考閱)하고, [[1470년]] 이전(吏典)의 교정과 감수도 맡아보았다.
 
[[1477년]](성종 8년)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조선 성종|성종]]이 자신을 더 도와달라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478년]](성종 9년) 병으로 사망하니 사망당시 향년 56세였다. 문정(文靖)의 시호가 내려졌다.
 
== 비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