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질 (1422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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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생애 초기 ===
==== 출생과 소년기 ====
쌍곡 김질은 [[1422년]] 조선 개국 공신 [[김사형]](金士衡)의 증손이며 [[동지중추부사]] [[증직|증]] [[의정부]][[영의정]] [[김종숙]]의 아들로 태어났다.
 
음서제로 관직에 입문하여 [[충의위]](忠義衛) 부사직 등을 지냈다. 그뒤 부사직으로 재직 중 [[1447년]](세종 29년) [[식년과]]의 생원시에 2등으로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다. [[1450년]] 부사직으로 재직 중 휴가를 얻어 [[성균관]]에 입학,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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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정창손]]의 딸 정씨와 결혼하였다.
 
==== 청년 시절 ====
음보로 출사하여 [[충의위]](忠義衛)가 되었으며 그뒤 여러 벼슬을 거쳐 [[충의위]] 부사직(副司直)에 이르렀을 때 사가독서(賜暇讀書)를 청원했다가, 특별히 허락받았다. 그는 과거 급제자가 아닌데도 참상관의 자격으로 사가독서를 청하여 [[세종대왕]]이 이를 허락했다. 그가 과거 급제자가 아닌데도 사가독서를 한 일은 후일 성균관에서 참상관의 수학제도의 전례가 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추장[[문과]]에 응시하여 정과로 급제, 바로 [[성균관]]주부가 되었다. 그 뒤 집현전 학사가 되었으며, 사간원우정언, 병조좌랑을 지내며 [[집현전] 학사를 겸임하였다. 김질은 글씨를 잘 썼고 고전에 능하였으며 지식이 해박하였다. 그 무렵 [[성삼문]](成三問), [[박팽년]], 최항(崔恒), [[신숙주]](申叔舟) 등 몇몇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문종]]의 각별한 사랑과 총애를 받았다.
 
[[조선 문종|문종]]은 병세가 깊어지자 부왕 [[조선 세종|세종대왕]]이 그랬듯이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서 어린 세자를 잘 부탁한다는 부탁을 거듭 하였다. 그러나 뒤에 그는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했다가 직전에 등을 돌리게 된다.
=== 관료 생활 ===
 
==== 과거 급제와 관료생활 ====
=== 관료 생활과 정치 활동 ===
==== 과거 급제와 관료생활 초반 ====
그해 [[집현전]] [[수찬]]에 뽑혔고,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가 [[1452년]](문종 2) [[2월]] 정기인사 때 승의랑(承議郞) [[사간원]] [[우정언]](司諫院右正言) 등을 지냈다. 그 무렵 그는 [[성삼문]], [[최항]], [[신숙주]] 등과 함께 문종의 각별한 지우와 총애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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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가 중간에 [[사육신]]의 고변을 밀고한 점을 들어 여러 신하가, 김질이 함께 모반하였는데 성패를 관망하다가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어서야 고한 것이라 하여 주살하기를 청하였으나, 세조는 듣지 않고 그를 신뢰하였다.<ref name="seong09">성종실록, 성종 9년 무술(1478, 성화 14) 2월 24일(정사) "상락 부원군 김질의 졸기"</ref>
 
==== 사육신의 난 진압 직후 ====
사육신의 거사를 고변한 공으로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로 승진했고 [[조선 세조|세조]]의 각별한 신임을 받아 원종공신에서 정공신인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으로 승급되었으며<ref>세조실록 4권, 세조 2년(1456 병자 / 명 경태(景泰) 7년) 7월 3일(경오) 1번째기사 "좌익 3등 공신 정창손을 2등으로 올리고, 김질을 3등으로 기록하게 하다"</ref> 특별히 말 한필을 선물로 받았으며<ref>세조실록 4권, 세조 2년(1456 병자 / 명 경태(景泰) 7년) 7월 10일(정축) 2번째기사 "좌익 공신 김질에게 말 한필을 하사하다"</ref> 상락군(上洛君)에 봉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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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뒤 겸 경연 영사(兼經筵領事)를 겸하다가 곧 [[좌의정]]으로 승진했다. 이어 상락군에서 상락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이때 [[세종대왕]]의 능침을 이장할 때 [[천릉 도감]] 제조(左議政遷陵都監提調)의 한사람으로 선발되었고, [[1469년]] [[1월]] 평안도 도체찰사(左議政平安道都體察使)로 다시 부임하였다. 그해 [[2월]] 다시 [[좌의정]](右議政)에 임명되었다.
 
[[1468년]] [[조선 세조|세조]]가 붕어하였을 때 [[한명회]](韓明澮)·[[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원상]]이 됐고, [[1469년]] [[조선 예종|예종]]이 죽었을 때도 [[한명회]]·[[신숙주]]와 함께 원상직을 수행하였다.<ref>[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3g1982a 김질 - Daum 백과사전<!-- 봇이 붙인 제목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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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는 영의정 [[한명회]](韓明澮), [[신숙주]] 등과 함께 원상 세력을 형성하여 왕실을 견제하였다. [[1469년]] 성종 즉위후 경연청영사(經筵廳領事)에 임명되고, [[1470년]] 사옹원 제조(司饔院提調)가 되었다. 그 뒤 정치적 영향력이 큰 구성군 준(龜城君 浚)을 공격, 숙청하였다.
 
[[1471년]]에는 성종의 즉위를 도운 [[좌리공신]]을 서훈할 때 좌리공신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 2등(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2等)으로 서훈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졌다. [[조선 성종|성종]] 때는 《고려사절요》의 증보 편집, 《경국대전》의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다.
 
세조의 공신으로 특히 세조의 병제개편에 깊이 관여하였으며, 1465년에 병전(兵典)을 고열(考閱)하였으며, 1470년에는 이전(吏典)의 교정, 교열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성종 초반, 관료들이 사적으로 보유한 사노비들의 수를 점검하게 하여 이를 감시, 사병을 형성하는 것을 방지하게 했다. [[1472년]]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이 되었다.
 
세조의 공신으로 특히 세조의 병제개편에 깊이 관여하였으며, 성종 초반, 관료들이 사적으로 보유한 사노비들의 수를 점검하게 하여 이를 감시, 사병을 형성하는 것을 방지하게 했다. [[1472년]]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이 되었다.
 
==== 최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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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7년]](성종 8년)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조선 성종|성종]]이 자신을 더 도와달라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478년]](성종 9년) 병으로 사망하니 사망당시 향년 56세였다. 문정(文靖)의 시호가 내려졌다.
 
== 평가와 비판 ==
김질은 풍의(風儀)가 아름답고 언론(言論)을 잘하였으며,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를 우애(友愛)로 대하였다.<ref name="seong09"/>고 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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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서적 ==
<small>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996)
* 정두희, 조선초기지배세력연구 (일조각, 1983)
*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 한영우, 〈王權의 確立과 制度의 完成〉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9 (국사편찬위원회, 1981)
* 박병호, 經國大典의 編纂과 頒行〉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9, (국사편찬위원회,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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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422년 태어남]]
[[분류:1478년 죽음]]
[[분류:음서 제도]]
[[분류:과거 급제자]]
[[분류:음서]]
[[분류:조선의 무신]]
[[분류:조선의 문신]]
[[분류:조선의 정치인]]
[[분류:조선의 군인]]
[[분류:육군 군인]]
[[분류:조선의 학자]]
[[분류:조선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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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김구]]
[[분류:조선 세종]]
[[분류:조선 세조]]
[[분류:한명회]]
[[분류:신숙주]]
[[분류:훈민정음]]
[[분류:좌익공신]]
[[분류:좌리공신]]
[[분류:안동 김씨 (구)]]
[[분류:한국의 장군]]
[[분류:경기도 출신]]
[[분류:조선 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