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티노 공세: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ZéroBot (토론 | 기여)
잔글 r2.7.1) (로봇이 더함: pt:Batalha de Asiago
잔글편집 요약 없음
25번째 줄:
그래서 런던 밀약 때도 이탈리아가 연합국이 되는 대가로 이 지역을 할양받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는 각각 병력을 그 지역에 배치시켰다. 그런데 이탈리아군이 이손초 강에서 공세를 취하는 까닭에 전투는 이손초 강 일대에서만 벌어지게 되었다. 동쪽의 러시아군 및 [[발칸 반도]]의 세르비아와도 전투를 벌이는 중이었던 까닭에 상대적으로 병력이 적은 오스트리아군은 이손초 강에서는 수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오스트리아군 참모총장 [[콘라드 폰 회첸도르프]](Konrad von Hoetzendorf)는 이손초 강에는 이탈리아군 주병력이 배치돼 있기 때문에 트렌티노와 맞닿아있으면서 병력이 허술한 [[아시아고]](Asiago)일대에 공격을 하기로 하였다. '''아시아고 전투'''라고 불리는 것도 이때문이다. 이 공격은 우선 이손초 강에서 이탈리아군의 위협을 감소시키는 것이었고 만약 베네토 주의 주요도시들인 베네치아와 [[베로나]](Verona,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유명한 곳) 등을 함락시키게 되면 후방 지원이 끊어진 이손초 강 일대의 이탈리아군을 섬멸하는 것이 최종목적이었다. 전형적인 포위 섬멸 전략이었다.
 
콘라드는 3월 이손초 강에서의 [[5차 이손초 전투|이탈리아군 5번째 공세]]가 실패하고 나자 콘라드는 트렌티노에서의 공세를 위해 독일군 참모총장인 [[에리히 폰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 [[1861년]] [[11월 11일]] ~ [[1922년]] [[4월 8일]], [[헬무트 폰 몰트케 (1848년)|소몰트케]]가 [[1차 마른 전투]] 패배의 책임을 지고 해임된 후 참모총장이 되었다)에게 9개 사단가량의 지원병력을 요청했지만 팔켄하임도 서부전선에서 대규모 공격을 계획중이였으므로 이 청을 거절하였다. 이에 콘라드는 무리하게 [[발칸 전역 (제1차 세계 대전)|발칸 전선]]과 [[동부 전선 (제1차 세계 대전)|동부 전선]]의 오스트리아군 정예부대를 차출하여 당클(Dankl)의 11군과 코베쏘(Kovess)의 3군의 총 18개 사단을 3월 중순까지 집결시켰다.
 
콘라드는 이 2개군을2개 군을 유진(Eugen) 대공의 휘하에 배치하였다. 오스트리아군은 Schlanke Emma를 포함한 2000여 문의 포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Schlanke Emma는 305mm에 달하는 거포로 385kg 정도의 대포알도 쏠 수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군 참모총장 카도르나도 이 일대에서 공격을 예상했지만 브뤼싸띠(Brussati)의 1군만을 이 일대에 배치시켰다.
 
이탈리아군은 이 일대에서 병력 수와 대포 수에서 오스트리아군에 4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5월 14일]] 오스트리아군은 70킬로미터에 달하는 전선에서 이탈리아군을 공격하였다. 이탈리아군은 5월 22일까지 8킬로미터나 후퇴하였고 이틀 후에는 1군 중앙이 아시아고까지 10킬로미터가량 밀려났다. 그렇지만 이탈리아군은 완전히 격파되지는 않았다. 급히 카도르나는 이 일대에 잘 정비된 철도시설을 이용하여 6월초순까지 40만에 가까운 병력을 투입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