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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스카이의 제정에 반대하는 봉기군이 각지에서 일어나 [[호국전쟁]]이 벌어지자, 차오쿤은 [[쓰촨 성]]으로 파견되어 [[차이어]] 군벌군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위안스카이가 죽은 다음 이해 9월 직예독군(直隸督軍)에 임명되었다. 1917년 총통 [[리위안훙]](黎元洪)과 총리 [[돤치루이]](段祺瑞)의 권력투쟁이 격화되자 [[쉬저우 시|쉬저우]] 회의에서 리위안훙이 요구한 [[장쉰]](張勳)의 상경에 명확한 태도를 밝히지 않았으나, 장쉰이 푸위의 복위를 꾀하자 돤치루이의 편에 섰다. 돤치루이는 이때 차오를 일이 수습되면 부총통으로 밀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차오는 이에 기뻐하여 바오딩에서 장쉰 토벌을 기치로 하는 서로토역군(西路討逆軍)을 조직하여 스스로 사령관이 되었다.
 
장쉰의 군대가 패하여 복벽이 무산되자, 장쉰 토벌군을 이끈 돤은 공화국 재건을 모토로 다시 정권을 잡고 무력으로 전국을 통일하려는 정책을 폈다. 그러나 돤은 다시 대총통으로 오른 [[펑궈장]]과 대립하게 되었다. 자신이 직계 군벌인 차오쿤은 도리어 완계 군벌과 관계가 애매했다. 비록 그는 "남북정전을 제의하는 성명"(《通电倡议南北停战》)을 발표하였지만, 부총통을 시켜주겠다는 돤의 유혹에 넘어가서 최종적으로 돤의 완계 군벌로 전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