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령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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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령전투'''(雙嶺戰鬪)는 병자호란이[[병자호란]]이 진행되던 중 1637년 1월 2일에 쌍령에서[[쌍령]]에서 벌어진 조선군과[[조선]]군과 청군의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청군에게 참패하였으며, 이는 결국 남한산성에서 항전하고 있었던 인조가 청나라에게 항복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우리 민족역사 3대 패전 (칠천량해전,쌍령전투,현리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 병자호란의 시작 ==
1636년 청나라의[[청나라]]의 태종이 조선의 무례한 태도를 문제삼아 직접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였다. 청군의 갑작스런 대규모 공격에 조선군은 곳곳에서 무너졌다. 순식간에 압록강을 돌파한 청군은 평양을 지나 불과 열흘만에 조선의 수도인 한양에 육박하였다. 이에 놀란 조정은 강화도로 피신을 시도했으나 이미 청의 기병들이 길목을 차단하고 있었고, 할수없이 조정은 남한산성으로 향하였다.
 
당시 남한산성에는[[남한산성]]에는 1만3천명의 병사들이 있었으나 청의 대군이 곧 성을 포위하여 상황이 다급해졌다.
=== 경과 ===
남한산성에 고립되어 있던 인조를[[인조]]를 구원하기 위해 경상 좌병사 허완(許完)과 우병사 민영(閔栐)은 급히 군사들을 모집하여 출발하였다. 이 당시 모집된 조선군의 숫자는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대략 4만명 정도였다는 추측이 유력하다.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이들은 1월 2일 쌍령(雙嶺)에 도달하였고, 각각 허완과 민영이 이끄는 두 무리의 조선군은 각각 고개 양쪽에 진을 쳐 목책을 세워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남한산성 인근에 주둔하던 청군 6천명이 지금의 곤지암인 현산을 점령하고 쌍령으로 약 30여명의 척후병을 보냈다. 청의 척후병들이 조선군 목책에 다다르자 당시 거의 대부분의 병사들이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던 조선군은 곧바로 발포하였다. 그런데 숙련되지 못한 조선군 포수들은 이 발포에서 소지하고 있던 모든 탄환들을 거의 다 소진해 버렸고, 조선군 진영은 탄약을 요구하는 병사들로 인해 혼란이 야기되었다. 이를 지켜보던 청군이 조선군의 목책을 넘어 급습하였고, 이에 놀란 조선군은 탄약을 다 써버린 조총들을 내던지고 무질서하게 도주하기 이른다. 무질서한 도주 과정에서 수 많은 병사들이 넘어져 자기들끼리 밟고 밟혀 죽는 참극이 벌어졌고, 이 와중에 경상 좌병사 허완도 말에서 떨어져 압사당하였다.
 
이미 궤멸된 허완의 부대와는 달리 민영이 이끌던 조선군은 나름 청군을 잘 상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탄약을 재분배 하기위해 진영 한가운데에서 탄약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모아놓았던 화약이 조총의 화승 불꽃에 닿아 대폭발이 일어났다. 갑작스런 폭음에 조선군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고, 혼란에 빠진 조선군에게 청나라의 팔기병대 400명이 돌진하여 닥치는대로 베어버렸다. 조선군의 대오는 순식간에 무너졌으며, 대부분의 병사들이 밟혀 죽거나 도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