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십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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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자 유은(劉隱)의 선조는 [[후난성]]에 있다가 조부의 대에 복건으로 이주하여 남해 교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올려, 지역의 유력자가 되었다. 아버지 유겸(劉謙) 때 [[광저우|광주]](廣州)로 옮겨 [[황소의 난]] 때 공적을 세우고, 봉주(封州; 광동)자사가 되었다. 유은의 선조는 아랍계라는 설도 있다.
 
유겸이 사망한 후 그 지위를 이어받아 자사가 된 유은은 정해군절도사(靜海軍節度使; 광동, 광서)의 반란을 진압하고 오히려 이것을 기회로 삼아 [[904년]] 정해군절도사가 되었다. 그후그 후 광동 전지역과 광서의 일부를 지배하고, 당나라 멸망과 더불어 자립할 준비를 하였다. 거기에 남해 교역으로 얻은 이익을 토대로 광동, 광서에 세력을 넓혀 반독립 세력화되었다. 이에 대해 당시 중원의 세력이었던 [[후량 (오대)|후량]]은 [[909년]] 그를 남평왕(南平王)에, [[911년]] 남해왕(南海王)에 임명했다. 유은은 남해왕에 임명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뒤를 계승한 동생 [[유엄]](劉龑)은 [[917년]] 황제를 칭하고 완전히 독립했다. 국호는 처음엔 대월(大越)이라고 했으나, [[918년]] [[전한]], [[후한]]을 건국한 유씨(劉氏)와 같은 성씨라고 하면서 한(漢)이라고 고쳤다. 남한의 이름은 다른 정권과 구별하기 위해 후대의 역사가가 명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