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 (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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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 (楊汀, ? ~ [[1466년]])은 [[조선]] 전기의 무신이다. 무예가 뛰어났으며 내금위(內禁衛)의 무사로 있다가 [[한명회]]의 천거로 [[조선 세조|수양대군]]의 측근이 되었다. 본관은 [[청주 양씨|청주]] 또는 [[안악 양씨|안악]]이다. [[조선 세종|세종대왕]]의 후궁이자 [[조선 단종|단종]]의 유모인 [[혜빈 양씨]]와는 9촌 숙질간이 된다.
 
[[조선 세조|세조]]의 총애를 받아서 그 후 건국 공신에 여러차례 임명됐고, 그뒤그 뒤 [[공조판서]],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를 거쳐 [[1458년]]부터 [[1465년]]까지 평안도 도절제사, [[병마절도사]]를 지내는 등 외관직을 역임하고 [[1466년]] [[1월]] 귀경하나, 오랫동안 북방의 변경지대에서만 근무하였다는 것에 대하여 커다란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해 [[9월]] [[세조]]가 특별 위로연을 베풀었는데, 취중에 세조에게 양위하라고 권유했다가 그만 세조의 분노를 사서 대간과 [[승정원]] 등의 탄핵을 받고 사형당했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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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정난]]이 성공하자, 정난을 성공시킨 공로로 정난공신(靖難功臣)2등에 책록되고 청원군(淸原君)에 봉군되었으며, [[1455년]](단종 3년) [[조선 세조|세조]]가 즉위하자 즉위를 도운 공로로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책록되고 양산군(楊山君)에 개봉되었다.
 
이후 [[공조]][[판서]], 지중추원사 등 중앙의 주요직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나, 주로 함경도·평안도 등 북방의 변경지대에서 근무하였다. 그뒤그 뒤 판경성부사,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를 거쳐 [[1461년]](세조 7)에는 다시 함길도 도체찰사와 평안도 도체찰사, [[1463년]]에는 평안도도절제사 겸 영변부사 등을 역임하는 등 주로 북방의 변경지대에서 근무하였다. 그는 이러한 사실에 커다란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1466년]]에 임기가 차서 중앙에 소환되면서 그해 [[9월]] [[조선 세조|세조]]가 북방에서 오래 근무한 일로 위로연을 베풀었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취중에 [[조선 세조|세조]]에게 '상감께서도 오랫동안 왕위에 계셨으니 이제 편히 여생을 즐기는 것이 어떠냐'며 왕위를 선위(禪位)하라고 진언하였다.
 
세조는 공신으로서 오랫동안 지방에 나가 있게 한 것이 민망하여 위로의 잔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신면]] 등의 탄핵을 받아 투옥, 처형되고, 아들들은 성주의 관노가 되었다. 이러한 그의 언동이 기록된 《[[세조실록]]》에서 당시의 사관은 그가 훈구대신임에도 불구하고 변방에서만 근무하였다는 것에 대하여 평소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언동을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