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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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9년]](성종 21년) 식년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예안군|예안]] 현감으로 올라 선정을 베풀어 많은 칭송을 받았다. 이때의 선정으로 백성들이 그의 생사당<ref>살아있는 인물의 사당</ref>을 세웠고, 홍문관수찬을 거쳐 1496년(연산군 2년) [[신용개]](申用漑)·[[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뒤그 뒤 [[홍문관]]전한으로 승진하였으며, 춘추관편수관을 겸해 《성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인이고, [[김일손]], [[신용개]] 등과 친분관계인 이유로 파 당했다가 [[1501년]](연산군 7년) 왕명으로 특별히 복직하여 부호군으로 다시 서용되었다. [[1504년]](연산군 10년) [[성균관]][[대사성]]에 올랐으나 [[갑자사화]]로 다시 좌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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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중종 반정}}
 
그뒤그 뒤 [[성희안]], [[유순정]] 등이 [[중종반정]]을 거사할 때 동참해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그는 반정에는 소극적이었으나 [[중종반정]] 뒤 [[예조]][[참판]] 겸 동지경연사로 승진되었으며, 이어 [[이조]][[참판]], [[호조]][[참판]], [[사헌부]][[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513년]]부터 지중추부사, [[의정부]][[우참찬]], [[이조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 [[공조판서]] 등을 거쳐 [[한성부]][[판윤]]으로 나갔다가 [[의정부]][[우찬성]]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그는 [[조광조]](趙光祖), [[김정]]. [[김식]] 등의 신진 사림파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에 반대하였다. [[남곤]] 등과 함께 신진 사림의 위훈삭제, 현량과의 설치 등 사림파의 개혁 정치에 반대론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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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기묘사화|신사무옥}}
 
[[1519년]] [[심정 (1471년)|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고형산]](高荊山) 등과 함께 모의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키는데 협력, [[조광조]](趙光祖)와 그의 신진 세력들을 숙청시키기도 했다. [[남곤]], [[안당]] 등이 [[조광조]] 일파의 사형에는 반대하고 유배나 감형을 주장한 반면 그는 [[조광조]] 일파를 도와주기를 거절하였다. 그뒤그 뒤 [[기묘사화]]에 참여한 공로로 그는 [[원종공신]]이 되었으며, [[의정부]][[우의정]]으로 승진했다가 [[1520년]](중종 15년) [[의정부]] [[영의정]] 겸 세자사가 되었다.
 
[[조광조]], [[김식]] 등이 사사된 후 [[김종직]] 학파에서는 [[남곤]], 김전 등을 배신자로 인식하고 비판, 경멸하게 되었다. [[김종직]] 학파 출신으로 [[중종 반정]]에 참여했으며 그와 교류하던 [[성희안]]과 [[유순정]] 역시 이미 사망하여 그들의 편을 들어주는 인물은 없었다. [[기묘사화]] 당시 [[조광조]] 등을 구명하지 않은 일로 비판과 성토의 대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