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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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는 무학을 매우 신임하였다. 1393년 회암사에 역질이 돌자 무학의 건강을 염려하여 광명사로 옮기도록 하였고<ref>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계유 7월 19일 두번째 기사</ref> 1397년에는 장수를 기원하는 탑을 [[회암사]] 북쪽에 세워주었다.<ref name="글로벌-자초"/> 또한 태조 자신도 왕위를 물려준 뒤 회암사에서 지내기도 하였다.<ref>박경남, 《우리겨레 문화유산. 3: 인천 경기도 강원도》, 삼성당, 2009년, ISBN 8914017036, 72쪽</ref>
 
그뒤그 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사이가 소원해진 태조와 태종 부자의 화해를 위해 여러번 함흥과 한성을 오갔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태조의 마음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무학은 [[조선 태종]] 2년([[1401년|1401]]) [[회암사]] 감주(監主)가 되었으나, 이듬해에 사직하였고, [[금강산]] [[금장암]]에 들어가서 여생을 마쳤다([[1405년|1405]]).<ref name="글로벌-자초"/> 사망 후 [[조선 태종|태종]]의 명으로 [[무학대사비]]가 건립되었다.<ref>[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research&No=1&Num=48 회암사 무학대사비],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 시스템</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