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위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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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 야망에 불탄 위고는 [[아카데미 프랑세즈]]를 지배하고 있던 의고전파와 대립하여 당시의 문단에 발흥하고 있던 낭만주의 운동에 참가하여 자택에 같은 경향의 젊은 작가와 화가를 모아 차차로 낭만파의 지도자가 되어갔다. 희곡 《크롬웰(Cromwell, 1827)》에 붙인 서문은 고전주의 이론에 대항한 낭만주의 연극이론의 선언서로서 유명하다. [[7월 혁명]]의 해인 [[1830년]]에는 위고의 희극 《에르나니(Hernani, 1830)》의 초연에 즈음하여 낭만파와 고전파 간에 문학사상 유명한 '에르나니 논쟁'이 일어났다. 이 논쟁에서 낭만주의는 고전주의를 압도하여 이후 1850년경까지 문단의 주류를 점유했다. 그 후에도 위고의 왕성한 활동은 계속되어 시집 《가을낙엽(Les Feuilles d'automne, 1831)》, 《황혼의 노래(Les Chants du crépuscule, 1835》, 《마음의 소리(Les Voix intérieures, 1837)》, 《빛과 그늘(Les Rayons et les ombres, 1840)》, 희곡으로 《마리용 들로름(Marion Delorme, 1831)》, 《루이 블라스(Ruy Blas, 1838)》 등이 이어서 발표되었다.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Notre-Dame de Paris, 1831)》는 위고에게 소설가로서의 지위를 굳혀 주었다. 1841년에는 대망의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
 
그뒤그 뒤 10여 년간 위고는 거의 작품을 발표하지 않고 정치활동에 전념하였다. 그 원인으로는 희곡 《성주(Les Burgraves, 1843)》가 낭만주의 풍조에 싫증난 관객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실패로 끝난 것과 가장 사랑하는 딸이 사고로 죽은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애지중지하던 열아홉 살의 맏딸 레오폴딘은 결혼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센 강]] 하류 빌키에에서 사위와 함께 보트 전복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이 불행한 사고로 인해 위고는 6개월이나 펜을 들지 못할 정도로 깊은 좌절과 혼란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2월 혁명]]을 비롯한 주위 정세에 자극을 받아 위고는 인도주의적 경향을 더 한층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