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드스톡 페스티벌: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A0b1c2 (토론 | 기여)
잔글 →‎바깥 고리: clean up, replaced: 외부 링크 → 바깥 고리 using AWB
편집 요약 없음
10번째 줄:
| 날짜 =
| 장르 = 록, 포크
| 웹사이트 사이트 = [http://www.woodstock.com/ 공식 웹사이트]
}}
 
20번째 줄:
우드스탁은 음향 시설이 형편없었고 음식과 물과 화장실도 턱없이 부족했으며 게다가 폭우가 쏟아져 농장은 거대한 진흙뻘 같았다. 하지만 이런 열악한 상황도 우드스탁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 미국의 히피문화, 즉 반문화 공동체의 열기를 누그러뜨리진 못했다. 부족한 샤워 시설과 폭우는 천진난만하게 물장구를 칠 물 웅덩이로 대체되었으며 진흙 뻘은 히피들의 낭만적인 놀이터가 되었다. 사랑과 평화의 모토를 단 그곳은 '우드스탁네이션'으로 명명되었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4명의 젊은이들(존, 조엘, 아티, 마이클)이 돈을 대고 기획을 해서 드디어 1969년 8월 15일부터 열리게 되었다. 사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지역 당국과 주민들의 반발로 인해 공연 자체가 무산될 위기에 처했으나 인근 지역에 살고 있던 막스 야스거라는 사람이 자신이 소유한 농장을 제공하여 무사히 공연이 개최될 수 있었습니다.
 
 
==== 출연자 ====
 
30만명이라는 미국인들과 함께 히피 공동체의 '지상 낙원'을 꾸민 출연자는 지미 헨드릭스, 컨트리 조 & 더 피시(Country Joe & the Fish), 후,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Sly & the Family Stone), 조 카커(Joe Cocker), 산타나(Santana), 텐 이어스 애프터(Ten Years After),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Butterfield Blues Band), 블러드, 스웻 앤 티어스(Blood, Sweat & Tears), 존 바에즈(Joan Baez), 알로 거스리(Arlo Guthrie), 크로스비, 스틸스, 내쉬 앤 영(Crosby, Stills, Nash & Young), CCR, 더 밴드(The Band), 그레이트풀 데드, 제퍼슨 에어플레인, 라비 샹카 등이었다.
Jimi Hendrix는 미국 국가를 조롱하듯 연주해 환호를 받았고 Janis Joplin 또한 뜨거운 열창으로 관객에게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다. Crosby, Stills & Nash 와 Neil Young 의 멋드러진 화음과 포크의 여왕 Joan Baez의 시원한 노래도 들을 수 있었고 흑인 포크가수 Richie Havens의 두터운 저항의 목소리도 울려 퍼졌다. 그리고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Grateful Dead의 초기 나른한 사이키곡들과 Jefferson Airplane의 초기 히트곡도 들을 수 있다. Melanie도 빼놓을 수 없다. 영국에서 온 Ten Years After와 The Who는 이 공연 후에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된다. Joe Cocker가 완전히 자기만의 식으로 부른 Beatles의 ‘With a little help from my friend’는 후에 3장짜리 LP로 발매된 공연 실황 앨범(CD로는 2장)의 백미로 평가된다. 이 곡은 관중과 같이 호흡하며 우드스탁의 분위기를 가장 잘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모든 장르의 락음악이 총집결한 한바탕의 잔치였다.
 
 
==== 1969년의 사회적 배경 ====
 
1969년은 미국 내의 여러 사회문제들이 불거질 대로 불거진 해였다. 흑백간의 인종차별, 월남전 참전에 대한 반전시위 등으로 상당히 혼돈스러웠으며 60년대 초의 젊은 계층의 프로테스트 정신은 약화되고 2차대전 직후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는 소위 'Flower Movement'에 동참하며 히피족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들은 반전, 사랑, 평화를 외치지만 적극적인 의미의 사회참여가 아니라 도피적이자 이상향만을 찾는 소극적인 계층이었다.
우드스탁 페스티발이 열린 사흘 동안 우드스탁은 공연을 즐기고, 마약을 마음껏 즐기고, 사랑이 넘쳐나는 그들만의 공화국이자 해방구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기성세대와 정부가 이 행사를 곱게 볼리 없었고, 언론의 힘이 컸던 시대였던 만큼 여론도 좋지 았았다. 하지만 히피가 주축인 관객들은 악천후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별다른 사고 없이 그들의 열린 세상을 즐겼다. 최근 다시 열린 우드스탁 공연의 난장판과 비교하면 당시의 참여한 관중들이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을 할 수 있다.
줄 36 ⟶ 32:
==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경제적인 영향 ==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거대한 규모의 페스티벌의 상업적 성공의 전례가 되었다. 뮤지션의 높은 개런티(후와 그레이트풀 데드는 현금으로 1만 5천 달러를 요구했다)와 입구를 부수고 무임승차한 청중으로 인해 페스티벌 자체는 130만 달러의 큰 손실을 기록했다. 하지만 개봉 첫 5주 동안만 2천 5백만 달러를 벌어들인 영화[Woodstock]의 3장짜리 사운드트랙과 비디오 출시가 이어져 결과적으로 우드스탁은 총 5천만 달러라는 엄청난 수익을 남겼다.
 
 
 
==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사회적인 영향 ==
줄 43 ⟶ 37:
 
몬터레이와 우드스탁은 청년들을 하나의 문화 블록으로 형성시켰고, 1960년대의 낙관주의와 청년 연대의 상징이 되었다. 우드스탁은 그들에게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이상향 혹은 향수의 대상이 되었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1969년 미국, 변화에 대한 갈망으로 끓어오르던 시기의 미국에서 열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1960년대 카운터컬처와 반전운동을 상징하는, 20세기의 가장 큰 문화적 사건이었다.
 
 
== 우드스탁을 기억하며, 테이킹 우드스탁 ==
 
우드스탁을 회고하는 책과 영화는 그간 많았는데, 엘리엇 타이버의 회고록인 [[테이킹 우드스탁]]은 한때 무산 위기에 처했던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어떻게 무사히 열려 전설로 남게 되었는지에 관한 폭소와 눈물 가득한 뒷이야기이다.
 
줄 54 ⟶ 46:
 
[[테이킹 우드스탁]] 한국판은 독특한 글쓰기와 가사 번역으로 유명한 팝 칼럼니스트 성문영 씨가 번역을 맡아 음악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위트 넘치는 번역으로 촌철살인의 유머와 감동을 고스란히 살려냈다.
 
 
==== 엘리엇 타이버는 누구인가? ====
 
본명은 엘리야후 타이크버그. 그는 압도적인 종교적 아우라에 짓눌려 사는 유대인과 이탈리아인들이 대부분인 뉴욕 브룩클린 벤슨허스트에서 성장했다. 각각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출신의 유대계 이민자였던 부모님은 독특한 교육철학과 투철한 절약정신을 가진 이들이었는데, 아버지는 자식 교육이라면 일단 매질부터 하고 봤고 어머니는 블랙홀보다 강한 흡입력으로 돈을 빨아들이는 수전노였다. 엘리엇은 늘 멍청하고 뚱뚱하다는 말을 들으며 자라 애정 결핍에 자신감 부족인데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에게서 텔레파시를 받는다는 엄마의 뜻에 따라 랍비 신학교 `예시바`에 보내져 제대로 된 동네친구 하나 사귀지 못한 채 고독한 유년 시절을 보낸다.
 
줄 113 ⟶ 103:
 
== 바깥 고리 ==
* {{언어고리|en}} [http://www.woodstock.com/ 공식 홈페이지웹사이트]
 
[[분류:미국의 록 페스티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