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엽: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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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비 위치 = [[1루수]], [[좌익수]], [[지명 타자]]
|프로 입단 연도 = [[1995년]]
|드래프트 순위 = [[1995년 한국 프로야구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1995년]] 고졸우선지명([[삼성 라이온즈]])
|첫 출장 = [[한국야구위원회|KBO]] / [[1995년 대한민국 프로야구|1995년]] [[4월 15일]] </br> [[잠실야구장|잠실]] 대 [[LG 트윈스|LG]]전 <br/> [[일본야구기구|NPB]] / [[2004년 일본 프로야구|2004년]] [[3월 27일]] <br/> [[세이부 돔]] 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세이부]]전
|마지막 경기 = [[일본야구기구|NPB]] /[[2011년 일본 프로야구|2011년]]
|획득 타이틀 = <nowiki></nowiki>
'''한국 프로야구 타이틀'''
* [[1997년]] 홈런왕, 타점왕, 최다안타, MVP
* [[1998년]] 최고 장타율, 득점왕
* [[1999년]] 타격 5관왕 (홈런, 득점, 출루율, 타점, 장타율). MVP
* [[2001년]] 홈런왕, MVP
* [[2002년]] 홈런왕, 타점왕, 득점왕, 최고장타율 MVP
* [[2003년]] 홈런왕, 득점왕, MVP
* [[1997년]] ~ [[2003년]] 골든 글러브(1루수)
* [[2012년 한국 시리즈]] MVP
|연봉 = 8억 원 (2012년)
|경력 = <nowiki></no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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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추어 야구 경력 ==
청소년 시절 [[투수]]와 [[타격 (야구)|타자]], 양쪽 모두 뛰어난 자질을 보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투수로[[투수]]로 좀 더 이름을 알렸다. 그는 경상중학교 재학 당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기도 했고, [[경북고등학교]] 재학 시절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1993년 청룡기 대회]]에서 팀 우승을 이끌며 우수 투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ref>[[스포츠 조선]] - 2010년 5월 기사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5/16/2010051601132.html "최동원, 선동열, 이승엽, 추신수, 봉중근, 이대호, 류현진… 청룡기가 낳은 한국 야구 대들보"]</ref> [[1994년]] 청소년 국가 대표로 선발된 이승엽은 투타 고루 활약을 펼치며 팀 우승을 이끌었다.<ref>''[[OSEN]]'' - 2007년 12월 기사 [http://www.osen.co.kr/news/Sports_View.asp?gisano=G0712260021&code=110100 "이승엽-이대호, 모교서 방망이 날세운다"]</ref><ref name="homerun">스포츠 춘추 - 2010년 9월 [[박동희 (기자)|박동희]]의 칼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95&aid=0000000463 "이대호로 본 ‘홈런 타자는 어떻게 탄생하나’"]</ref>
 
== [[한국 프로 야구]] 경력 ==
== 이승엽 ==
이승엽은 단말필요없다. 이승엽이 짱임! 최! 강! 승! 짱! 오오오오오오ㅗ!!!!!!!!!!!!!!!!
승짱보다 더 쨩인사람이 있스므니까??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과하고 어마어마한 홈런과 그 안타실력!
진짜 최고!! 승짱 쓰릉흔뜨!!!
 
== 대한민국 프로야구 경력 ==
=== [[삼성 라이온즈]] 시절 ===
[[경북고등학교]] 졸업에 맞추어 [[1995년 한국 프로야구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연고 지명]]을 통해 계약금 1억 3,200만 원에 연봉 2천만 원의 조건으로 [[1995년]] 연고 팀 [[삼성 라이온즈]]에 투수로[[투수]]로 입단하였다. 좌완 [[투수]] 유망주였으나 [[경북고등학교]] 시절 당했던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ref>[[문화일보]] - 2009년 9월 기사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9091701032230073002 "이의수의 마흔 이후 남자의 생존법 - 실패는 성공을 잉태한다"]</ref><ref>[[동아일보]] - 2010년 8월 기사 [http://news.donga.com/3/all/20100820/30624874/1 "투수 → 타자 변신 성공시대… 타자 → 투수는 왜 잘 안 될까"]</ref> 삼성 입단 초기부터 [[투수]] 훈련에 애를 먹은 그는 첫 스프링 캠프에서 [[박승호 (야구 선수)|박승호]] 타격코치로부터 1년만 타자로 뛸 것을 권유받았고, 이후 내야수로좋은 반응을 보여 [[내야수]]로 완전히 전향하였다.<ref>[[마이 데일리]] - 2010년 8월 기사 [http://www1.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1008101138562229 "이대호·이승엽·추신수, ‘잘 던져야 잘 친다’… 투수 출신들 맹활약"]</ref> 그가 타자로 전향하자 ‘좌승엽 우승관’ 으로 불리며 기대를 받았던 입단 동기 내야수 [[김승관]](현 상원고 코치)은<ref>엑스포츠 - 2010년 7월 기사 [http://xportsnews.hankyung.com/?ac=article_view&entry_id=123613 "추신수와 부산고의 황금 시대를 이끈 한화의 김백만"]</ref> 상대적으로 기회가 적어져 [[2004년 대한민국 프로야구|2004년]] [[롯데 자이언츠|롯데]]에 트레이드된 후 [[2007년 대한민국 프로야구|2007년]]에 방출되어 그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 타자로 완전히 적응하면서 프로 첫 해부터 가능성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점차 그는 거포로서의 재능을 뽐내며 붙박이 [[클린업 타자|3번 타자]] 겸 [[1루수]]로 자리매김해 나갔다. 프로 입단 3년차인 [[1997년 대한민국 프로야구|1997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그의 타격이 정점을 찍기 시작하면서 그는 [[한국 프로 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자로 거듭났다.<ref name="homerun" /><ref>스포츠 춘추 - 2009년 12월 박동희의 칼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95&aid=0000000338 "양준혁이 말하는 ‘선구안 향상법’"]</ref>
 
* [[1995년 대한민국 프로야구|1995 시즌]] 0.285의 타율과 13개의 홈런과 73타점을 기록해 장거리 타자로서 자질을 보였고, 이후 당시 [[백인천]] 감독에게서 ‘인천 부두 타법’을 전수받은 뒤 본격적인 홈런 타자로 실력을 뽐내기 시작했다.<ref name="sword">스포츠 춘추 - 2010년 2월 박동희의 칼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95&aid=0000000365 "외다리 타법의 창시자, ‘야구는 도(道)이고, 타격은 검(劍)’"]</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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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대한민국 프로야구|2002 시즌]]에 [[현대 유니콘스]]의 [[심정수]]와 홈런 경쟁을 벌여 47개를 기록하여 홈런왕을 차지했으며, 대구에서 열린 [[2002년 한국 시리즈]] 6차전에서는 마지막 타석 전까지 20타수 2안타로 극도의 타격 부진을 보이다가 9회말 [[LG 트윈스|LG]] [[투수]] [[이상훈 (1971년)|이상훈]]으로부터 극적인 동점 3점포를 터뜨리며 추격의 발판을 마련하였고, 이는 곧 [[마해영]]의 [[끝내기 홈런|끝내기]] [[백투백 홈런]]으로 이어져 소속 구단 [[삼성 라이온즈]]에게 창단 후 첫 [[한국 시리즈]] 우승의 기쁨을 안겼다.
 
* [[2003년 대한민국 프로야구|2003년]] [[6월 22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대구]]에서 [[SK 와이번스|SK]] [[투수]] [[김원형]]을 상대로 솔로 홈런을 기록하여 [[일본]]의 [[오 사다하루]](27세 3개월 11일)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 [[앨릭스 로드리게스]](현 [[뉴욕 양키스]]/당시 [[텍사스 레인저스]]ㆍ27세 8개월 6일)를 제치고 세계 최연소 300호 홈런 고지(26세 10개월 4일)에 올랐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2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대구]] [[롯데 자이언츠|롯데]]전에서 [[투수]] [[이정민 (1979년)|이정민]]으로부터 56번째 홈런을 쳐내며 [[대한민국 프로야구 홈런 관련 기록|대한민국 프로야구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세웠다. 이는 곧 [[아시아]] 신기록이 되었다.(그 이전에는 [[오 사다하루|왕정치]]가 [[1964년]]에 세운 55개).<ref>스포츠 춘추 - 2008년 10월 박동희의 칼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95&aid=0000000106 "김광현의 비자책점을 둘러싼 논란"]</ref><ref>스포츠 춘추 - 2010년 7월 박동희의 칼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95&aid=0000000439 "‘거인(巨人)의 별’ 롯데 홍성흔"]</ref>
 
== 일본 프로 야구 경력 ==
=== 지바 롯데 마린스 시절 ===
==== 2004년 ====
FA 자격을 취득한 후 [[2003년]] 12월에 [[지바 롯데 마린스]]와 계약하였다. 연봉은 2억 엔이었는데, 당시 지바 롯데 멤버 중 이승엽을 제외하고 2억 엔이 넘는 선수는 마무리 투수인[[투수]]인 [[고바야시 마사히데]]밖에 없었음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대우였다. 이런 파격 대우 때문에 다른 롯데 선수들이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는데, 이는 롯데가 타 선수들의 대우를 전면적으로 개선하는 것으로 진정되었다. 이듬해인 [[2004년]] [[3월 27일]], [[세이부 돔]]에서 열린 원정 개막전 [[클린업 타자|4번 타자]]로 선발 출장, 상대 투수는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세이부]]의 대표적인 에이스 투수이자[[투수]]이자 ‘괴물 투수’인 [[마쓰자카 다이스케|마쓰자카]]로부터 2루타를 기록했다. 하지만 좋았던 첫 시작과 달리 시즌 종료 후 14홈런, 타율 0.240, 50타점이라는 비교적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 2005년 ====
시범 경기에서 타율 0.150이라는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면서 결국 2군으로 강등되었다. 그러나 4월 초 1군으로 복귀하면서 팀의 중심 타선으로 정착했다. 하지만 상대팀 선발 투수가 좌완일 경우 선발 타선에서 제외되는 플래툰 시스템에 의해 기용되었다. 시즌 최종 타율은 0.260이었지만 홈런 수가 팀 내에서 최다인 30개(이 기록은 [[지바 롯데 마린스의마린스]]의 現 홈 구장인 [[QVC 마린필드마린 필드]] 개장 이후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기록한 기록이었다.)로, 전년도에 비해 장타력 부분에서의 제 기량을 찾았고, 소속팀인 지바 롯데의 플레이오프 진입에도 공헌하였다.
 
[[2005년 재팬 시리즈|재팬 시리즈]]에서 처음 맞붙은 센트럴리그[[센트럴 리그]] 소속의 [[한신 타이거스]] 투수들에게 매우 강한 면모를 보였는데, 1차전에서 만난 한신의 좌완 에이스인 [[이가와 게이]]로부터 홈런을 기록했고, 2차전에서도 좌완 [[에구사 히로타카]]로부터 홈런을 기록했다. 3차전은 스타팅 멤버에서 제외되었지만 4차전에서는 [[스기야마 나오히사]]로부터 선제 홈런(2점 홈런)을 쳐내는 등의 맹활약을 펼치며 소속팀 롯데가 [[1974년 재팬 시리즈|1974년]] 이후 31년 만에 재팬 시리즈 챔피언 등극을 하는데에 있어 크게 공헌하였으며, 그 해 재팬 시리즈 MVP도 유력하였으나 안타깝게 MVP 수상은 하지 못했다.
 
[[2005년]] 시즌 종료 후 열린 [[2005년 아시아 시리즈|아시아 시리즈]]에서는 친정 팀인 [[대한민국]]의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 각각 5번과 3번 타자로 출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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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
==== 2006년 ====
[[2005년]] 시즌이 끝나고 [[지바 롯데와의롯데 마린스]]와의 계약이 종료되면서 재계약을 하는재계약하는 듯했으나 수비 위치 보장과 극단적인 플래툰 시스템 하의 기용 등 본인의 의사와 롯데가 내세운 조건이 맞지 않았기에않아 [[자유 계약 선수]] (FA)가 되었다. 이후 감독으로 재부임한 [[하라 다쓰노리|하라]] 감독 아래 팀 전력의 보강을 꾀하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2006년]] [[1월 19일]]에 전격으로 계약하였다.<ref>스포츠 춘추 - 2008년 9월 박동희의 칼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95&aid=0000000083 "일본 프로 야구의 대리인 제도를 말한다"]</ref>
 
[[하라 다쓰노리|하라]] 감독은 이승엽을 개막전 4번 타자로 파격 기용하였는데, 이러한 감독의 믿음에 부응하듯 이승엽은 [[일본]] 진출 이후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다. 반면 이승엽의 맹활약과는 반대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팀 자체는 주전 선수들의 잇따른 부진과 부상자부상자가 속출하는 등으로 인해 2005 시즌에 이어 2년 연속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였다.
 
그가 기록한 [[2006년]] 성적은 타율 2위(0.323), 타점 3위(108), 홈런 2위(41개<ref>실제로 2006년 이승엽은 42개의 공을 펜스 너머로 넘겼지만, 이 중 [[2006년]] [[6월 11일]] [[지바 롯데 마린스]]와의 대결에서 3회 초 2사 1루 상황, 상대 선발 투수 [[와타나베 슌스케|와타나베]]로부터 친 홈런이 심판 판정에 의해 단타로 처리되면서(심판은 당시 1루 주자 [[오제키 데쓰야]]가 3루를 밟지 않고 홈에 들어왔다고 판단하였다) 공식 기록은 41개가 되었다.{{뉴스 인용|제목=<nowiki>[스포츠 10대 해프닝②]</nowiki> 이승엽, 도둑 맞은 19호 홈런|url=http://media.daum.net/breakingnews/sports/view.html?cateid=1071&newsid=20061221135010895&p=joynews24|출판사=조이뉴스24|저자=최정희|작성일자=2006-12-21|확인일자=2008-09-22}}</ref>)를 기록하여 공격 전 부문에서 리그 정상급의 활약을 펼쳤다. 특히 홈런에서는 일본 진출 이후 최다 홈런을 기록했는데 6월에는 12개를 몰아치며 리그 홈런 1위에 올라섰다. 그러나 8월 중순 경 발생한 무릎 부상 이후 홈런 페이스가 주춤해졌고, 시즌 중반부터 페이스를 높여 온 [[주니치 드래건스]]의 [[타이론 우즈]]에게 홈런 숫자에서 추월당하면서 결국 리그 최다 홈런 2위로 2006 시즌을 마감하였다. 타율은 주니치의 후쿠도메에게 밀리고 홈런과 타점은 우즈에게[[타이론 우즈]]에게 밀렸지만 시즌내내시즌 내내 도루를 제외한 타격 전 부문에서 최상위권을 유지하며 최정상급의 기량을 뽐낸 해이다.
 
==== 2007년 ====
[[2006년]] 시즌 종료 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에 진출하려고 했던 이승엽은 그 계획을 소속 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우승 이후로 연기하였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맺은 계약 내용은 외부에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4년 계약이라는 큰 틀 안에서 시즌이 끝날 때마다 다시 계약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소속 구단 요미우리가 계약 기간 중 우승할 경우 메이저 리그 진출을 보장받는 옵션이 계약 내용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승엽의 [[2007년]] 시즌 연봉은 6억 5천만 엔(약 한화 70억원) 정도였다. 이는 이전 요미우리 소속이던 1루수 [[로베르토 페타지니|페타지니]]의 7억 엔의 뒤를 잇는 높은 거액의 조건이다(페타지니는 이전 소속 구단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야쿠르트]]에서 7억 2천만 엔을 받고 있었다).
 
이듬해 2007년 1월, 이승엽은 모친상 소식을 [[일본]]에서 전해 들었고 왼쪽 엄지손가락에 염증이 생기는 부상 등 시즌 내내 고전하였다. 외다리 타법을<ref name="sword" /> 고쳐 보기도 했지만 성적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7월 중에는 스스로 2군행을 자처하기도 하였다. 시즌 후반기에는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요코하마]]와의 첫 경기에서 연타석 홈런을 치는 등 부진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으며, 시즌 말미에는 승부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홈런을 여러 개 쳐 내며 요미우리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홈런을 한 개도 치지 못하는 등 장타력이 실종된 모습을 보이며 시즌을 마감하였다.<ref name=world>{{뉴스 인용|제목=이승엽 2007년 시즌 결산, 모친 타계… 부상… 악재의 연속|url=http://media.paran.com/snews/newsview.php?dirnews=2246545&year=2007|출판사=세계일보|저자=강구열|작성일자=2007-10-22|확인일자=2008-06-01}}</ref> 종합적으로 2007 시즌에는 타율 0.274, 30홈런, 74타점을 기록하였다.
 
==== 2008년 ====
시즌 초반에는 심각한 슬럼프에 빠지며 2군으로 강등되었다.<ref>스포츠 춘추 - 2008년 4월 박동희의 칼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95&aid=0000000011 "한·일 전문가가 꼽는 이승엽의 문제"]</ref> 그러던 중 8월에 있은있었던 [[2008년 하계 올림픽 야구|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하여 [[대한민국]]의 금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특히 그는 4강전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일본]]과의 경기에서 투런 홈런을, [[쿠바 야구 국가대표팀|쿠바]]와의 결승전에서도 투런 홈런을 뽑아 내며 자신의 건재함을 보였다.<ref>스포츠 춘추 - 2008년 8월 박동희의 칼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95&aid=0000000079 "한-일 기자 대담 “9회초 대타 김현수가 의미하는 것”"]</ref><ref>스포츠 춘추 - 2008년 8월 박동희의 칼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95&aid=0000000080 "일본에서 본 “호시노 JAPAN의 침몰”"]</ref> 그러나 그 해 요미우리에서 45경기에 출장하여 2할 5푼의 타율에 7할 5푼 5리의 OPS를 보였으며, 8홈런 27타점에 그쳤을 뿐만 아니라, [[2008년 일본 시리즈|일본 시리즈]]에서도 극도의 부진을 드러냈다. 그 해 [[일본 시리즈]]는 센트럴 리그 우승 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퍼시픽 리그 우승 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의 경기로 진행되었는데 거기서의 이승엽은 7경기 동안 홈런과 타점 없이 18타수 3안타(타율 0.167)에 삼진을 12개나 당하는 등 극심한 부진에 시달리기도 했다.
 
==== 200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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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
{{부분 토막글|야구}}
타격 면에서 예년에 비해 크게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시즌 내내 2군과 1군을 오가면서 최종 성적 5홈런 11타점을 기록하는 데 그쳤고, 시즌 막판 1군 레귤러 멤버에 다시 포함된 뒤 요미우리의 센트럴 리그 클라이막스 시리즈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제대로 된 성적을 내지 못하였다. 시즌 종료 후 [[2010년]] [[11월 16일]] [[요미우리 자이언츠]]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았다. 이후 [[일본]] 잔류를 위해 팀을 물색하던 이승엽은 결국 [[퍼시픽 리그]] 소속의 [[오릭스 버펄로스]]와 1억 5천만 엔에 플러스 옵션이 포함된 연봉으로 계약하여 [[일본 프로 야구]]에 잔류하게 됐다.
 
=== 오릭스버펄로스[[오릭스 버펄로스]] 시절 ===
==== 2011년 ====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방출된 후 [[2010년]] [[12월 2일]] [[퍼시픽 리그]] [[오릭스 버펄로스]]와 1년간 1억 5,000만 엔 + 옵션이 포함된 연봉을 계약했다. 이 때 [[투수]] [[박찬호]]와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이로써 [[2005년]] 이후 6년만에 다시 [[퍼시픽 리그로리그]]로 돌아와 등번호도 3번으로 정해졌다. 이승엽은 연봉을 대폭 낮추는 등의 백의종군 모습을 보였지만 시즌 전 NPB가 공인구를 반발력이 적은 것으로 교체해 찾아온 극심한 투고타저의 영향을 받아 타율 0.201라는 저조한 성적을 남겼다. 하지만 후반기 들어 맹활약하며 시즌 총 홈런 15개를 치며 퍼시픽 리그 홈런순위홈런 순위 8위에 오르는 기대 이상의 모습도 보여줬다보여 줬다.
 
=== [[대한민국한국 프로야구프로 야구]] 복귀 선언 ===
[[2011년]] [[10월 21일]] [[오릭스 버펄로스]]의 [[고베]] 구장인 [[고베 종합 운동 공원 야구장|호토모토 필드]]에서 기자 회견을 열어 8년간의 [[일본 프로 야구]] 생활을 정리하고 영구 귀국했다.<ref>{{뉴스 인용|제목='국내 복귀' 이승엽, 日서 기자회견 '굿바이, 오릭스'|url=http://news.sportsseoul.com/read/baseball/979943.htm|출판사=스포츠서울|작성일자=2011-10-21}}</ref> 이후 자녀 교육을 위해 [[서울특별시]]로 이주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76&aid=0002218871 이승엽, 와이프에게 어쩔 수 없는 경상도 남자인가 보다] - 스포츠조선</ref> [[2011년]] [[12월 5일]] 연봉 8억, 플러스 옵션 3억에 친정 팀 [[삼성 라이온즈]]와 계약을 체결하여 복귀했다.이승엽은 복귀 후 [[2012년]] 타율 타율00.307, 21홈런 85타점을 기록해 여전히 강타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보여 주었다. 또한 그는 SK와의[[SK 한국시리즈에서와이번스]]와의 [[한국 시리즈]]에서 1홈런 7타점으로7타점을 한국시리즈기록했고 MVP를6차전에서 수상하였다.<ref>{{뉴스싹쓸이 인용|제목='국내3루타를 복귀'기록해 이승엽,데뷔 日서 기자회견[[한국 '굿바이,시리즈]] 오릭스'|url=http://newsMVP를 수상하였다.sportsseoul.com/read/baseball/979943.htm|출판사=스포츠서울|작성일자=2011-10-21}}</ref>
 
== 국가 대표 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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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사항 ==
* 부친 : 이춘광
* 모친 : 김미자 (2007년 작고<!--고(故)는 붙이지 마십시요--><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3&aid=0000280455 이승엽 모친 6일 별세]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뉴시스</ref>)
* 배우자 : [[이송정]] (2002년 결혼)
** 첫째 아들 : 이은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