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종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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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1939년]] [[1월 17일]] [[일본]] [[도쿄 시|도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동 문학|아동문학가]] [[마해송]](馬海松)이며, 어머니는 [[무용|무용가]] 박외선(朴外仙)이다. 부모님으로부터 예술적 자질을 물려받은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시쓰기를 좋아했고 중학생 시절에는 이미 당대 ‘학원’ 문단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서울고등학교]],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원을 졸업했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본과 3학년이던 1959년, 시 「해부학 교실」 등의 작품으로 박두진 시인의 추천을 받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며 1960년에는+ 첫시집 『조용한 개선』을 상자했다. 그리고 이 시집으로 연세대학교 제정 제1회 ‘연세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즈음 마종기는 가톨릭에 입교한다. 1963년에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대한민국 공군|공군]] [[중위]]로 임관하는데 이때 후일 오랜 친교를 나눌 정현종 시인과 교유한다. 1964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원에 입학. 시동인 모임 〈시단〉에 가입한다. 동인으로는 문덕수, 신동엽, 이형기 등이 있다. 1965년에는 ‘재경 문인 한일 회담 반대 서명’에 참여한 것으로 인해 공군방첩대에 체포되어 10일간 구류에 처해진다. 이후 1966년 그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박사과정에 입학하지만 [[대한민국 공군|공군]] [[군의관]] [[대위]] 만기 제대 직후 도미한다. 도미 이후 그는 미국 오하이오 주 데이턴Daton 시의 마이애미 밸리 병원 인턴으로 취직하며 의사로서의 경력을 이어간다. 이후 오하이오 의과대학 방사선과 조교수 겸 방사선 동위원소 실장, 오하이오 의대 소아과 임상 정교수 등을 지냈으며 오하이오 아동병원 초대 부원장 겸 방사선과 과장을 역임했다. 특히 1975년에는 오하이오 의과대학 졸업생 대표로부터 이 해 최고의 교수상(골든 애플상)을 받는데 이는 조교수급 동양인으로서는 첫 수상이었다.<ref> 마종기/정과리, 「유량·고난 혹은 운명의 궤적-안팎에서 함께 본 시인의 생애」, 정과리 엮음, 『마종기 깊이 읽기』, 문학과지성사, 1999. 참조 </ref>
도미 이후에도 1968년에는 김영태, 황동규와 함께 3인 시집 『평균율 1』을, 1972년에는 『평균율 2』를 출간하는 등 꾸준히 창작활동을 했으며 이후에도 2010년 출간된 『하늘의 맨살』에 이르기까지 한국에서 계속해서 문제적 시집을 출간하면서 이수문학상, 현대문학상, 박두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