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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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별명 = 자는 선익(善翼), 호는 송부(松阜)
|태어난 곳 = [[조선]] [[전라남도]] [[영광군 (전라남도)|영광군]]
|죽은 곳 = [[일제 강점기]] [[한국]] [[경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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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의'''(李鳳儀, [[1839년]] [[음력 2월 14일]] ~ [[1919년]] 양력 [[3월 13일]])는 [[조선]]말기의 무신, 관료이자 [[대한제국]]의 무신, 군인으로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이며 자는 선익(善翼), 호는 송부(松阜)이다. [[무과]] 급제 후 [[훈련대장]], [[어영대장]], [[포도대장]] 등을 지내고 [[돈령부]][[판사]]에 이르렀으며 완성군에 봉군되었다. [[전라남도]] 출신.
 
[[일제 강점기]]에 조선귀족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병석에 누워있고 아들이 그의 친구 [[한규설]]에게 찾아가 [[한일합방]] 때 주는 관작을 받아야 되느냐고 물었을 때, 나라에서 주는 것이니 그냥 받으라 하고, 자신은 작위를 사퇴하였다. 이 일로 [[한규설]] 집안과 절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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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양자생애 입양초반 ===
==== 출생 ====
왕족의 후손으로 [[고종]] 때 친군별영사(親軍別營使)를 지낸 이경우(李景宇)의 양자이다. 본래 [[호남]] 출신으로, 양아버지가 [[총어사]]를 지낸 무인 집안에 입적되었다. 처음 입적되었을 때 [[한성부]]에 올라와 호남 말씨를 쓰자 사람들이 놀렸고, 신중한 성격의 이봉의는 몇달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서울 말씨를 익힌 다음에야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일화가 있다.<ref> {{서적 인용
[[1839년]] [[음력 2월 14일]] [[전라남도]] [[영광군 (전라남도)|영광군]] 출신이다. 원래는 왕족의 후손으로,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의 후손이었으나, 그의 생가는 몰락하여 [[전라남도]]로 낙향했다. 후에 우연한 기회에 친군별영사(親軍別營使)를 지낸 이경우(李景宇)가 [[영광군]]으로 내려왔는데 아들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생부는 자신의 아들들 중 한 사람인 이봉의를 양자로 보냈다.
 
==== 양자 입양 ====
왕족의유년 후손으로시절 그는 [[고종]] 때 친군별영사(親軍別營使)를 지낸 이경우(李景宇)의 양자이다양자가 되었다. 본래 [[호남]] 출신으로, 양아버지가 [[총어사]]를 지낸 무인 집안에 입적되었다. 처음 입적되었을 때 [[한성부]]에 올라와 호남 말씨를 쓰자 사람들이 놀렸고, 신중한 성격의 이봉의는 몇달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서울 말씨를 익힌 다음에야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일화가 있다.<ref> {{서적 인용
|저자=황현
|제목=매천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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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전라남도]] [[영광군 (전라남도)|영광군]]에 정착한 몰락 왕족의 후손이었지만 그의 형과 그 중 이봉의가 그를 양자로 낙점하면서 [[서울]]로 상경한다.
 
원래는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의 후손이었으나, 그의 생가는 몰락하여 [[전라남도]]로 낙향했다. 양아버지 이경우의 집안은 대대로 고위 무관 벼슬을 지낸 가문으로 소론 무반의 집으로 5대 동안 6명의 대장을 배출한 명문가였다. 이봉의도 [[과거 (조선)|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 관료 생활 ===
==== 관료 생활 초반 ====
[[1893년]](고종 30년) [[한규설]](韓圭卨)의 후임으로 [[포도청]] 우포도대장이 되었고<ref>이때 한규설은 좌포도대장이 되었다.</ref>, [[1894년]] 제1차 김홍집내각(金弘集內閣)에서 총어사 겸경리사(摠禦使兼經理使)에 임명되었다. [[훈련대장]], [[어영대장]], [[포도대장]] 등을 지내고 [[1897년]](건양 1년) 경무사(警務使)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승정원]][[승지]]가 되었다가 [[돈령부]][[판사]]에 이르렀으며 완성군에 봉군되었다. [[1898년]] 이어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1869년]](고종 7년) [[9월]] [[효령대군]]의 후손이라 하여 [[흥선대원군]]이 특별히 승진시켜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임명되었다. [[1877년]] [[4월]] [[경기도]] [[수군절도사]]로 나갔다가 [[1879년]] [[12월]]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다. [[1883년]] [[5월]] 좌변 [[포도대장]]을 거쳐 [[1885년]] [[3월]] [[한성부]] [[판사]], [[1889년]] [[5월]] [[한성부 판윤]], [[1892년]] 우변 포도대장이 되었다.
 
[[1893년]](고종 30년) [[한규설]](韓圭卨)의 후임으로 [[포도청]] 우포도대장이 되었고<ref>이때 한규설은 좌포도대장이 되었다.</ref>, [[1894년]] [[7월]] [[형조판서]]에 임명되고, [[경무사]]에 임명되었다.
 
[[1894년]] [[제1차 김홍집 내각]](金弘集內閣)에서 [[총어사]] 겸경리사(摠禦使兼經理使)에 임명되었다. 이후 [[1902년]] [[12월]]까지 여러 번 [[경무사]]에 임명되었다. 그뒤 [[훈련대장]], [[어영대장]], [[포도대장]] 등을 지내고 [[1896년]] [[5월]]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 1등 의관]]을 거쳐 그해 [[9월]] [[강원도]][[관찰사]] 겸 [[강원도]][[재판소]] [[판사]]에 임명되었다.
 
==== 대한제국 시절 ====
[[1897년]](건양 1년) [[경무사]](警務使)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승정원]][[승지]]가 되었다가 [[1898년]](광무 1년) [[1월]]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돈령부]][[판사]]에 이르렀으며 완성군에 봉군되었다. [[1898년]] 이어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1901년]] [[11월]] 헌병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902년]] [[9월]] 다시 [[경무사]]에 임명된 뒤 [[대한제국]] 육군 참장으로 승진했다. 그해 [[11월]] 다시 헌병 사령관에 재임명되었다.
 
[[1903년]] [[3월]] 대한제국 원수부 회계국 총장을 거쳐, 그해 [[5월]] 대한제국 육군 부장(陸軍副將)이 되어 [[이완용]] 내각(李完用內閣)에서 [[군부대신]]을 지냈다. 그해 [[7월]] 군부대신으로 원수부 군무국 총장을 겸임하고, [[11월]] 행의정부 찬정이 되었다. [[1904년]] [[2월]] 원수부 검사국 총장에 임명되었다. [[1906년]] [[9월]] 판돈령원사(判敦寧院事)에 임명된 뒤 [[1907년]] [[9월]] 군대 해산으로 육군 부장으로 퇴역하였다.
 
[[1908년](융희 2년) [[2월]] [[한국통감]]부가 조선 유림들을 회유하기 위해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하에 조직된 [[대동학회]](大東學會)의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병으로 쓰러져 활동하지 못하고 집에 누워 있었다.
 
==== 혼수상태와 최후 ====
대한제국 육군 부장(陸軍副將)이 되어 [[이완용]] 내각(李完用內閣)에서 [[군부대신]]을 지냈다. [[1910년]] 병석에 누워 혼수상태였는데, 이후 9년간 병석에 누워 있다가 [[1919년]]에 사망한다. [[한일 병합 조약]] 이후 [[1911년]] [[1월]] 아들 이기원이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男爵) 작위와 2만 5천원의 은사공채를 수령하였다. 그의 작위는 아들인 [[이기원 (1880년)|이기원]]이 습작했다. 그해 [[2월]] [[조선총독부]] 총독 관저에서 열린 작기본서봉수식에는 부축을 받고 행사에 참석하고 되돌아왔다. 이후 계속 병석에 누워 있었다.
 
그러나 이후 그는 병석에서 의식불명상태로 9년간 있다 사망하였으므로 친일행위 여부로 단정짓기 어렵다.<ref>신익희의 증언, 그 뒤 김승학이 작성한 반민족행위자 명단에는 제외되었다.</ref>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 수여받았다. [[1912년]] [[8월]] [[한국병합 기념장]]을 받았고, [[12월]] 정5위에 서훈되었다.
대한제국 육군 부장(陸軍副將)이 되어 [[이완용]] 내각(李完用內閣)에서 [[군부대신]]을 지냈다. [[1910년]] 병석에 누워 혼수상태였는데, 이후 9년간 병석에 누워 있다가 [[1919년]]에 사망한다.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아들 이기원이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男爵) 작위와 2만 5천원의 은사공채를 수령하였다. 그의 작위는 아들인 [[이기원 (1880년)|이기원]]이 습작했다.
 
[[1915년]] [[7월]] [[조선총독부]]의 주도하에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시정사업을 선전하기 위한 총독부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가 개최되자 특별회원의 명단에 올랐다. 그해 [[11월]] [[다이쇼 천황]] 즉위식에는 병으로 불참하였으나 [[다이쇼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특별히 수여받았다. [[1919년]]] [[3월 13일]] [[경성부]]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이후 그는 병석에서 의식불명상태로 9년간 있다 사망하였으므로 친일행위 여부로 단정짓기 어렵다.<ref>신익희의 증언, 그 뒤 김승학이 작성한 반민족행위자 명단에는 제외되었다.</ref>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도 수여받았다.
 
=== 사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