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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료 생활 ===
==== 관료 생활 초반 ====
여러 벼슬을 거쳐 [[1869년]](고종 7년) [[9월]] [[효령대군]]의 후손이라 하여 [[흥선대원군]]이 특별히 승진시켜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 실각 후 숙청되지 않고 [[1877년]] [[4월]] [[경기도]] [[수군절도사]]로 나갔다가 [[1879년]] [[12월]]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다. [[1883년]] [[5월]] 좌변 [[포도대장]]을 거쳐 [[1885년]] [[3월]] [[한성부]] [[판사]], [[1889년]] [[5월]] [[한성부 판윤]], [[1892년]] 우변 포도대장이 되었다.
 
[[1893년]](고종 30년) [[한규설]](韓圭卨)의 후임으로 [[포도청]] 우포도대장이 되었고<ref>이때 한규설은 좌포도대장이 되었다.</ref>, [[1894년]] [[7월]] [[형조판서]]에 임명되고, [[경무사]]에 임명되었다.
 
==== 김홍집 내각 시절 ====
[[1894년]] [[제1차 김홍집 내각]](金弘集內閣)에서 [[총어사]] 겸경리사(摠禦使兼經理使)에 임명되었다. 이후 [[1902년]] [[12월]]까지 여러 번 [[경무사]]에 임명되었다. 그뒤 [[훈련대장]], [[어영대장]], [[포도대장]] 등을 지내고 [[1896년]] [[5월]]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 1등 의관]]을 거쳐 그해 [[9월]] [[강원도]][[관찰사]] 겸 [[강원도]][[재판소]] [[판사]]에 임명되었다.
 
[[1897년]](건양 1년) [[경무사]](警務使)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승정원]][[승지]]가 되었다가 [[1898년]](광무 1년) [[1월]]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돈령부]][[판사]]에 이르렀으며 완성군에 봉군되었다. [[1898년]] 이어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 대한제국 시절 ====
[[1897년]](건양 1년) [[경무사]](警務使)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승정원]][[승지]]가 되었다가 [[1898년]](광무 1년) [[1월]]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돈령부]][[판사]]에 이르렀으며 완성군에 봉군되었다. [[1898년]] 이어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1901년]] [[11월]] 헌병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902년]] [[9월]] 다시 [[경무사]]에 임명된 뒤 [[대한제국]] 육군 참장으로 승진했다. 그해 [[11월]] 다시 헌병 사령관에 재임명되었다.
 
[[1903년]] [[3월]] 대한제국 원수부 회계국 총장을 거쳐, 그해 [[5월]] 대한제국 육군 부장(陸軍副將)이 되어 [[이완용]] 내각(李完用內閣)에서 [[군부대신]]을 지냈다. 그해 [[7월]] 군부대신으로 원수부 군무국 총장을 겸임하고, [[11월]] 행의정부행[[의정부]] 찬정이[[찬정]]이 되었다. [[1904년]] [[2월]] 원수부 검사국 총장에 임명되었다. [[1906년]] [[9월]] 판돈령원사(判敦寧院事)에 임명된 뒤 [[1907년]] [[9월]] 군대 해산으로 육군 부장으로 퇴역하였다.
 
[[1908년](융희 2년) [[2월]] [[한국통감]]부가 조선 유림들을 회유하기 위해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하에 조직된 [[대동학회]](大東學會)의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병으로 쓰러져 활동하지 못하고 집에 누워 있었다. [[1910년]](융희 4년) [[10월]] 그는 병석에 누워 혼수상태였는데, 이후 9년간 병석에 누워 있다가 [[1919년]]에 사망한다.
 
==== 혼수상태와 최후 ====
[[1910년]] 병석에 누워 혼수상태였는데, 이후 9년간 병석에 누워 있다가 [[1919년]]에 사망한다. [[한일 병합 조약]] 이후 [[1911년]] [[1월]] 아들 이기원이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男爵) 작위와 2만 5천원의 은사공채를 수령하였다. 그의 작위는 아들인 [[이기원 (1880년)|이기원]]이 습작했다. 그해 [[2월]] [[조선총독부]] 총독 관저에서 열린 작기본서봉수식에는 부축을 받고 행사에 참석하고 되돌아왔다. 이후 계속 병석에 누워 있었다.
 
그러나 이후 그는 병석에서 의식불명상태로 9년간 있다 사망하였으므로 친일행위 여부로 단정짓기 어렵다.<ref>신익희의 증언, 그 뒤 김승학이 작성한 반민족행위자 명단에는 제외되었다.</ref>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을 수여받았다. [[1912년]] [[8월]] [[한국병합 기념장]]을 받았고, [[12월]] 정5위에 서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