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피어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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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RobertPeary.jpg|thumb|로버트 피어리]]
'''로버트 에드윈 피어리'''(Robert Edwin Peary, [[1856년]]~[[1920년]])는 [[미국]]의 [[해군]]·[[북극]] [[탐험가]]이다. 북극 탐험에 뜻을 품고 여러 번 [[그린란드]]를 조사하였다. [[1898년]] 이후에는 북극 탐험을 행하였다. [[1909년]] 인류 최초로 북극의 극지에 [[성조기]]를 꽂았다고 알려져 왔으나, 1996년에 발견된 피어리의 새로운 일지를 검토해본 결과 북극점에서 40km 못미친 지점까지만 도달한 것으로 밝혀졌다. 북극점에 도달하지 못한것과는못한 것과는 상관없이 탐험으로 북극이 깊은 바다라는 것과 북극에 대한 여러 가지 사실이 밝혀졌다. 저서로 《북극》, 《북쪽의 빙하》 등이 있다.
 
== 피어리의 반인륜적인 행위 ==
아래는 피어리의 반인륙적인 행위에 대한 설명이다.<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9722128</ref>
로버트 피어리는 이누이트들과 교역을 트며 북극 탐험에 이들을 이용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피어리는 이누이트들을 가혹하게 부려먹었으며 심지어 여섯명의여섯 명의 이누이트들을 속여 1887년 미국 뉴욕으로 데리고 왔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누이트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구경 인파도 20,000명이나 되었을 정도. 피어리에 속아 뉴욕으로온 여섯 명의 이누이트 중에는 카누크와 미닉 부자도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기후변화로 이들 중 4명이 목숨을 잃는다. 미닉의 아버지도 그 중 하나.
당시 언론에서는 이누이트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구경 인파도 20,000명이나 되었을 정도. 피어리에 속아 뉴욕으로온 여섯명의 이누이트 중에는 카누크와 미닉 부자도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기후변화로 이들 중 4명이 목숨을 잃는다. 미닉의 아버지도 그 중 하나.
 
그러나 이들의 장례가 어떻게 치뤄졌는지는 알 수 없다. 자연사박물관 직원 보아스는 에스키모인들의 유해를 병원으로 후송해 해부하였고 급기야는 자연사박물관에 에스키모관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만 있을 뿐이다. 그 후 보아스는 '중앙 에스키모'란 논문을 출간(1888년), 미국 인류학계로부터 크게 인정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