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주의 교육의 확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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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교육내용이나 교수방법의 측면에서 과거에 있었던 어떤 것과도 같지 않은 새로운 교육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학교 교육에 도입하고자 하는 인간과 자연세계(우주)에 대한 새롭고 보다 넓은 지식은 이제 막 발견되는 과정에 있었으며, 이러한 지식들이 기초해야할 [[과학적 방법]]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불완전한 상태였다. 또, 이 당시의 정치ㆍ사회적 상황을 고려할 때 개인의 자유로운 발달이라는 이상은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즉, [[종교개혁]]이 제시한 자유가 사회생활과 공공생활에서 실현되지 않은 상태에서 교육의 자유가 실현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미래를 지향하는 제2 [[르네상스]] 운동은 16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시기 유럽의 모든 학교에서는 고전 학습이 절대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었으며, 종교계는 다시 한 번 혼란에 휩쌓여 있었다. 제2 르네상스 운동 초기에는 기성 [[인문주의]] 운동과 제2 르네상스 운동 간의 큰 대립이 나타나지 않은 상태였다. 특히 인문주의와 제2 르네상스의 발상지인 이탈리아에서는[[이탈리아]]에서는 새로운 것이 옛것을 대체하듯, 제2 르네상스로의 이행은 매우 순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의 이러한 이행의 특징은 교육의 목적을 삶과 실용성에 둔 것이었다. 즉, 교육의 대상을 성직자나 학자가 될 사람들이 아니라 살무자와 선량한 시민이 될 ‘속세의 청년’으로 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이면에는 오랜 기간동안 이탈리아 사상의 근반이었던 ‘세속적 인간상에 대한 반이교도적 정신’이 있었다<ref>이 정신은 이교도적 요소가 종교계와 대립하여 세속적 세계에서 큰 힘을 발휘하고 있을 때, 펠트레의 비토리노가 제시한 학자신사(scholar-gentleman)이라는 개념으로 나타난 바가 있다.</ref>.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이 제2 르네상스의 정신적 측면은 이전의 르네상스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결과를 가져온 것만은 사실이었다. 학자들의 학문이 현학화되어 현실과 점차 유리되어갈 때 교육의 이상이 학자다운 것에서 신사하둔 것으로 점차 변화해갔던 것이다. 이제 교육의 목표는 학자를 양성하여 우연히 자신의 적성을 발견하게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 지식으로 성장(盛裝)을 한 신사를 기르는 것으로 바뀌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