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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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일자=2007-10-23
|작성일자=2004-12-09
}}</ref>, [[부산]])는 [[대한민국]]의 정치인, 외교관, 공무원이다. 그는 주중국 대한민국 대사, 주일본일본 공사, 초대 주일본주 일본 대사와 [[대한민국]]의 외무부 장·차관을 지낸 외교관이자 [[1965년]] 체결된 [[한일회담]]의 수석대표였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현대사》라는 그의 책에서, 김동조를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협력한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체육인 겸 정치인 [[정몽준]]의 장인이며 영화배우 [[남궁원]] 가문, 독립운동가 [[손정도]], [[손원일]] 가문과도 사돈간이다.
 
== 생애 ==
[[1943년]] 일본 규슈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1951년]] 외무부 정무국장을 거쳐, 외무부 중화민국 대사, 외무부차관을차관을 지냈다. 1960년 2월, 한국 정부는 동남아 각국과의 우호 증진을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중화민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타이]], [[남베트남]] 등 5개국에 김동조를 단장으로 하는 친선사절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친선사절단은 단장 외에 [[차균희]](車均禧) 부흥부 경제계획관, [[최광수 (공무원)|최광수]] 외무부 삼등서기관으로 구성되었다. <ref>{{뉴스 인용 |url = | 제목 = 團長에金東祚氏 | 작성일자 = 1960-2-12 | 출판사 = 동아일보 }}</ref> 1960년 2월 23일, 친선사절단은 [[대한민국-말레이시아 관계|말레이시아와의 외교 관계]] 수립을 발표하였다. <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002240020920101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0-02-24&officeId=00020&pageNo=1&printNo=11646&publishType=00020 | 제목 = 外交使節을 交換... 韓國․馬來兩國間 合意 |작성일자 = 1960-2-24 |쪽=석간1 | 출판사 = 동아일보 | 인용문 = 韓國과 馬來聯邦은 二十三日 經濟 및 文化面에서의 緊密한 協調에 合意하는 한편 共産主義에 對한 兩國의 鞏固한 立場을 確認하였다. 韓國과 馬來兩國은 馬來政府官吏들과 韓國親善使節團(團長=金東祚氏)間에 있은 協商에 뒤이어 二十三日밤 聲明書를 發表하였다. 兩國은 또한 共同聲明書에서 外交使節을 交換할 것이라고 發表하였다.}}</ref>1965년 6월, 재일거류민단, 상공인연합회, 부인회는 공동명의로 김동원 대사를 경질해달라고 국회에 진정서를 보냈다.
 
1965년 10월 26일, 외무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김동조는 그 후 재일교포들이 그와 같은 진정서를 제출한 것은 교포와 재일교포 사이의 오해에 기인했던 것이고, 그 후 그 오해는 풀렸다고 설명했다. 또 이동원 외무부장관은 김대사가 본부 훈령에 충실치 아니한 점은 없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같은 날 국회 외무분과위원회는 위원장 [[김동환 (1927년)|김동환]]을 비롯하여 공화당의 [[변종봉]], [[민병기]], [[박현숙 (1896년)|박현숙]], [[박준규 (1925년)|박준규]], [[이만섭]] 의원, 야당의 [[나용균]], [[유진산]], [[강문봉]] 의원은 위 진정서를 검토한 결과, 김대사가 (1) 교포보호에 소흘하고 (2) 본부의 훈령에 충실치 못하며 (3)특정 재벌을 편애하므로 정부가 김대사를 될수록 조속한 시일 안에 해임할 것을 만장일치로 정부에 건의하였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510260020920101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5-10-26&officeId=00020&pageNo=1&printNo=13543&publishType=00020 | 제목 = 金大使解任건의 | 작성일자 = 1965-10-26 | 출판사 = 동아일보 }}</ref> 1965년 12월 18일 상오 10시반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열린, 대한민국과 일본 양국의 국교정상화를 최종적으로 매듭짓는 기본조약 및 협정에 의한 비준서 교환에 김동조는 한일회담수석대표로서 참석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5121800329201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5-12-18&officeId=00032&pageNo=1&printNo=6208&publishType=00020| 제목 = 오늘부터 韓日國交正常化 | 작성일자 = 1965-12-18 | 출판사 = 경향신문 }}</ref> 1965년 12월 말, 한국 정부가 주일 대사에 김동조를 내정하자, 12월 23일, 민중당의 [[김대중]] 의원은 국회 본회의에서 "국회 외무위가 만장일치로 그 해임을 건의했으며 재일교포단체에서도 소환을 건의한 바 있는 김동조 대사를 재임명할 수 있는가"를 추궁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512230032920102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5-12-23&officeId=00032&pageNo=1&printNo=6212&publishType=00020 | 제목 = 獨島領有權따져 | 작성일자 = 1965-12-23 | 출판사 = 경향신문 }}</ref><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5122300209201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5-12-23&officeId=00020&pageNo=1&printNo=13593&publishType=00020 | 제목 = 어떻게對處할것인가 | 작성일자 = 1965-12-23 | 출판사 = 동아일보 }}</ref> 그러나, 12월 24일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에 대해 정식으로 김대사에 대한 아그레망을 요청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512250032920101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5-12-25&officeId=00032&pageNo=1&printNo=6214&publishType=00020 | 제목 = 金東祚大使任命 | 작성일자 =1965-12-25 | 출판사 = 경향신문 }}</ref> 1966년 1월 14일, 주한 초대 대사 김동조는 일본 천황에 신임장을 제정하였다.<ref>{{뉴스 인용 |url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6121700329203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6-12-17&officeId=00032&pageNo=3&printNo=6517&publishType=00020 | 제목 = 日誌1年| 작성일자 =1966-12-17 | 출판사 = 경향신문 }}</ref> 1965년~1967년 주 일본 대사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