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 (고려):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Chobot (토론 | 기여)
잔글 robot Modifying: zh:高麗顯宗
36번째 줄:
[[여진족]]의 고발로 목종 폐립의 내막을 알게 된 요나라는 1010년 7월 목종 폐위 사건의 진상을 밝힐 것을 요구했다. 고려는 이에 진적과 윤여를 파견하여 폭종 폐위 사건의 양해를 구하였으나 요나라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요나라와 고려 양국간에 전쟁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삼아 30만 명의 군사를 주어 통주(평북 선천)에 진을 쳐 요나라군을 방어하게 했지만 강조의 죽음과 함께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통주에서 강조가 이끌던 정예부대를 대파한 요나라군은 여세를 몰아 남쪽으로 향했다. 요나라 성종이 [[평양|서경]]을 돌파하고 개경을 향해 돌격해오자 신하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현종에게 항복을 건의하였는데 예부시랑(禮部侍郞) [[강감찬]]만이 홀로 반대하고 나섰다. 강간찬의 건의에 따라 현종은 일단 [[광주시|광주]]로 피신했다. 그러나 요나라군이 개경을 함락시킨 후에도 계속 추적해 오자 현종은 [[공주시|공주]]를 거쳐 [[노령산맥]]을 넘어 나주로 피신했다. 이 과정에서 현종은 몇 번의 죽을 위기를 겪는데 그 때마다 중랑장(中郞將) 지채문의 호위로 무사할 수 있었다.
 
요나라군은 고려군과의 전면전으로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어 더이상 고려에 머물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입성 7일 만에 개경에서 물러나, 서둘러 다시 북쪽으로 퇴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