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주의 교육의 확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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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달다사레 카스틸리오네]]는 그의 이력이나 개인적 사상 면에서 완벽한 궁정인의 모습을 그려내는 데 최적의 인물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카스틸리오네는 청년기에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공부했고 [[고고학]]과 미술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얻었다. 20대에 들어선 카스틸리오네는 [[만토바]] 후작의 궁정에서 무관(武官)과 외교관으로 부역하였다. 이후 카스틸리오네는 [[우르비노]] 공작의 밑에서 행정관으로 부역했는데, 여기서 그는 [[기사 (군사)|기사]], 예술가, 저술가들과 교유하며 자신의 능력을 계발시켰다. 이와 같이 카스틸리오네는 젊은 나이에 인격과 능력을 인정받아 당대 혼란스러웠던 이탈리아에서 여러 관직과 외교 대사직을 수행했다. 그러나 [[1527년]] [[로마 약탈 (1527년)|로마 약탈]]이 있고 나서 2년 뒤 이 사태를 막지 못했다는 비난 속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다.
 
《궁정인》에 대해서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카스틸리오네가[[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카스틸리오네]]가 갖고 있던 약점을 고려해야 한다. 카스틸리오네의 생각은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향후 교육과 문화계에 엄청난 파장을 미칠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카스틸리오네는 우리비노의[[우르비노]]의 궁정에서 학자적 실무가의 이상형을 발견하였으며, 이 이상형의 모습을 무의식적 예술의 무예술적 완벽으로 표현한다는표현해야겠다는 구상을 하게 된다.
 
카스틸리오네가 제시한 인물의 전형적인 사례는 우르비노의 대공이었던 프레데리고(Frederigo)였다. 사실, 프레데리고는 카스틸리오네의 제자로, 만토바에 있던 비토리노의 기쁨의 집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기쁨의 집을 졸업한 프레데리고는 카스틸리오네의 지도를 받았다. 프레데리고는 카스틸리오네에게서 배운 것들을 실천으로 옮겼고, 이를 통해 자신이 다스리는 공국을 학문과 교육의 명성이 높은 국가로 키워냈다. 이전 세대 인사인 비토리노가 학자로서 문학에 대한 사랑의 입장에서 학자와 기사의 두 가지 인간상을 결합시키려 했다면, 프레데리고는 정치가로서 학자와 기사라는 두 인간형을 통합하여 통치의 정신을 문학과 예술에서 얻는 ‘학자 기사[Scholary Knight]’라는 새로운 인간형을 탄생시켰다. 프레데리고의 이러한 시도는 유럽에서 기존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인간형을 만들어내려는 것이었으며, 카스틸리오네가 아닌 프레데리고에서 ‘학자 기사’라는 인간형이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