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박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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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순조의 수렴청정을 행하던 [[정순왕후 (조선 영조)|정순왕후]]가 주도한 [[신유박해]]([[1801년]])로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의 교세는 몹시 위축되었으나, 정순왕후가 승하하고 이어서 권력을 누린 국구(國舅) [[김조순]]이 등용한 [[안동 김씨]] [[시파]]들 중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많았으므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누그러졌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31년]] [[9월 9일]] [[천주교 조선대목구]]를 설정하여 독립된 [[교구 (기독교)|교구]]가 탄생하였다. 그리고, 서양인 [[천주교]] [[신부]]로서는 처음으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 [[피에르 모방]]([[1836년]]<ref>[[음력]]으로는 1835년</ref>)과 [[자크 샤스탕]](1836년), 주교 [[로랑마리조제프 앵베르]](1837년) 등이 들어와서 [[천주교]]의 교세가 회복되고 신도는 증가되어 갔다. 이에 놀란 조정에서는 다시 박해 의논이 일어났고, 드디어 [[1839년]](헌종 5년)에 제2차 박해를 전개하였다.[[분류:|분류:]]
 
== 경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