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신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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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공사는 본국의 훈령에 따라 [[유길준]], [[서재필]] 등에게 신문 발행에 협력할 것을 약속한다.
 
== 창간과 발행 ==
=== 창간 ===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은 순[[한글]]과 [[영어]]로 인쇄, 발간되었다.<ref>독립신문의 영문판은 The Independent 라는 이름으로 발행되었다.</ref> 서재필은 정부로부터 창립 자금 4400원을 지원 받아 시작하였다.<ref name="sasah">[http://kid.chosun.com/site/data/html_dir/2006/04/06/2006040600031.html `독립신문` 창간(1896. 4. 7)] 조선일보 2006.04.06 </ref> 1896년 4월 7일 창간 당시 국배판(菊倍版)면으로 구성되었고 3면은 한글, 1면은 [[영어]]로 표기했다. 본문은 순한글 세로쓰기로 되어 있고, 논설과 광고, 국내외 소식 보도면으로 구성되었다. 한글판은 서재필과 [[주시경]]이 편집을 하였고, 영문판은 [[헐버트]]가 사실상의 편집자였다.
 
{{인용문2|만일 백성이 정부 일을 자세히 알고, 정부에서 백성의 일을 자세히 아시면 피차에 유익한 일이 많이 있을 터이요. 우리가 이 신문 출판하기는 취리하려는 게 아닌고로, 값을 헐하도록 하였고, 모두 언문으로 쓰기는 남녀 상하 귀천이 모두 보게 함이요. 또 구절을 떼여 쓰기는 알아보기 쉽도록 함이라.|독립신문 창간호 사설}}
 
{{인용문2|우리가 독립 신문을 오늘 처음으로 출판하는데, 조선 속에 잇는 내외국 인민에게 우리의 주의를 미리 말씀하여 아시게 하노라.
 
우리는 첫째, 편벽되지 아니한고로 무슨 당에도 상관이 없고, 상하 귀천을 달리 대접하지 아니하고, 모두 조선 사람으로만 알고, 조선만을 위하여 공평히 인민에게 말할 터인데, 우리가 서울 백성만 위할 것이 아니라 조선 전국 인민을 우히여 무슨 일이든지 대언하여 주려 함.<br />정부에서 하시는 일을 백성에게 전할 터이요, 백성의 정세를 정부에 전할 터이니, 만일 백성이 정부의 일을 자세히 알고, 정부에서 백성의 일을 자세히 아시면, 피차에 유익한 일만 있을 것이요, 불평한 마음과 의심하는 생각이 설명할 터이옴.
 
우리는 바른대로만 신문을 할 터인고로, 정부 관원이라도 잘못하는 이 있으면 우리가 말할 터이요, 탐관오리들을 알면 세상에 그 사람의 행정을 퍼일 터이요, 사사로운 백성이라도 무법한 일을 하는 사람은 우리가 찾아 신문에 설명할 터이옴.
 
또 한쪽에 영문으로 기록하기는 외국 인민이 조선 사정을 자세히 모른즉, 혹 편벽된 말만 듣고 조선을 잘못 생각할까 보아 실상 사정을 알게 하고자 하여 영문으로 조금 기록함.<br />그러한 즉 이 신문은 꼭 조선만 위함을 가히 알 터이요, 이 신문을 인연하여 내외, 남녀, 상하 귀천이 모두 조선 일을 서로 알 터이옴.
|독립신문 창간사, 1896년 4월 7일}}
 
필진으로는 [[유길준]], [[윤치호]], [[이상재]], [[주시경]] 등이 참여하였다.
 
=== 신문 발행과 운영 ===
[[파일:Yoon30.jpg|섬네일|right|140px|필진이자 제2대 사장 [[윤치호]]]]
 
특히 [[서재필]]은 [[주시경]]에게 회계사무원 겸 교열담당의 업무를 맡겨 신문사의 출납과 한글 교정을 맡게 했다. 또한 [[언더우드 학당]]에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호러스 언더우드]] [[목사]]와 관계가 다소 소원해졌으며 직업이 없어 고민인 [[김규식]]을 영입하여 취재기자로 고용하기도 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일반 민초들이 쉽게 알아보게 하려면 [[한글]] 단어 사용을 신중히 고려하였고, [[국문학]]자인 [[주시경]]을 영입하려 했고, 주시경의 노력에 힘입어 순[[한글]]로 간행할 수 있었다. [[주시경]]은 [[한글]] 표준어와 방언, 발음 등에 정통하였으며 독립신문 발간 중에도 쉬운 단어 선정을 위해 직접 연구를 거듭하기도 했다.
 
1897년 1월 5일부터 영문판이 분리되어 4면으로 구성된 The Independent가 발행되었다. 영문판에는 국제정세에 대한 칼럼이나 [[서재필]] 등의 논설 외에도 국내 사정이 영어로 번역되었다. 헐버트의 동생 아처도 한국으로 건너와 1년간 독립신문의 발행을 돕다가 귀국하였다. [[서재필]]은 [[신문]]을 발행하면서 전문 용어보다는 쉽게 [[한글]]로 풀이하도록 했는데, 처음에 300부를 찍었던 독립신문은 이내 발행부수 3000부가 넘는 신문으로 발전했고, 10여명으로 시작된 [[독립협회]]는 이내 4000명이 넘는 회원을 가진 큰 단체로 발전하면서 국민적 개혁 운동<ref name="chosun0408">[http://www.chosun.com/culture/news/200408/200408240343.html (운명의 20년) 서재필은] {{웨이백|url=http://www.chosun.com/culture/news/200408/200408240343.html |date=20131004230050 }} 조선일보 2004.08.24일자</ref>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그 뒤 [[윤치호]]가 경영을 맡은 이후에 [[1898년]] [[7월 1일]] 주3회에서 일간으로 바꿨다.
 
=== 한글 맞춤법 ===
독립신문은 최초의 [[한글]]판 신문이며 동시에 [[띄어쓰기]]를 지면에 반영하였다. [[한글]]은 창제 이후 한자와 마찬가지로 띄어쓰기를 하지 않고, 마침표를 찍지 않았는데, 독립신문의 발행으로 인하여 띄어쓰기가 정착되었다. [[호머 헐버트|헐버트]] 선교사가 발행한 영문 월간지 '한국소식'의 1896년 1월호에는 한글의 점 찍기 또는 띄어쓰기라는 [[윤치호]]의 글이 실렸는데, '장비가 말을 타고'라는 예와 '장비 가말을 타고'라는 예를 들어 띄어쓰기가 필요하다고 설명을 하였다. <ref>김동진, 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 124쪽, 참좋은친구 2010년</ref>
 
=== 서재필의 망명과 폐간 ===
[[파일:Independence Newspaper site.JPG|섬네일|배재학당 앞에 세워진 독립신문사터 표지석]]
 
독립신문은 근대적 여론 형성의 기틀을 마련했다.<ref name="diopos">[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10/21/2011102102297.html "일본인 발음으로 영어 못 배우겠소!"] 조선일보 2011.10.22</ref> 독립신문 창간은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정동구락부, 정동파, 친미파 등으로 불린 영어파 세력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이뤄졌다. 4면 가운데 3면은 한글 전용 '독립신문'으로 편집하고, 마지막 1면은 영문판 'The Independent'로 편집하였다. [[1898년]] [[7월 4일]]자 독립신문에는 영어 교습 광고도 실려 있었다.<ref name="diopos"/> "대한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고자 하나 학교에는 다닐 수 없고, 또 선생이 없어서 못 배우는 이가 많다 하기로, 영국 선비 하나가 특별히 밤이면 몇 시간씩 가르치려 하니, 이 기회를 타서 종용히 영어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은 독립신문사로 와서 물으면 자세한 말을 알지어다.<ref name="diopos"/>"라고 발표했다.
 
정부의 공격으로 출국하게 된 [[서재필]]은 [[윤치호]]에게 독립신문을, [[이상재]], [[양기탁]], [[이승만]], [[이동녕]] 등에게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맡아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이에 [[윤치호]]는 [[서재필]]이 출국하면 독립협회나 만민공동회, 독립신문 등을 3년도 유지시키기 어렵다고 했는데, 그는 최소한 1년 이상은 유지시킨다면 변화가 있을 것이라며 유지가 어렵더라도 1년 이상만 협회 등을 지켜줄 것을 부탁했다.
 
1898년(고종 35년) 5월 14일 서재필은 독자와 동포들에게 올리는 인사말을 남기고 서울에서 출산한 큰 딸 스테파니와 부인을 대동한 채 용산에서 인천행 배에 올랐다. 5월 27일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해 일본을 경유해 미국으로 향했다. 발간자인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 [[윤치호]]가 독립신문의 발간자를 맡았다. [[1899년]]에 윤치호가 물러나고, 선교사 [[아펜젤러]]가 맡았다. 1899년 6월 1일부터는 영국인 엠벌리가 맡았으나, 정부가 이 신문을 매수하여 1899년 12월 4일자로 폐간하였다.
 
== 평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