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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獨立新聞)은 [[1896년]] 4월 7일에 [[한국]]에서 최초로 발간된 민간 [[신문]]이자 [[한글]], [[영문]]판 신문이었다. 발간자는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이 중심이 되어, [[독립협회]](獨立協會)의 기관지로 발간되었다. [[서재필]]은 당시 4,400원을 발급받고 또 조선정부의 지원을 받아 [[4월 7일]]에 처음 발간했다. 4면 중 3면은 순국문, 1면은 영문으로 문장을 썼다. 필진으로는 [[유길준]], [[윤치호]], [[이상재]], [[주시경]] 등이 참여하였다.
 
[[서재필]]을 중심으로 발간했으나 그가 미국으로 망명한 뒤에 [[헨리 아펜젤러]]를 발행인으로 하여 [[윤치호]]가 맡아 발행하다가 독립협회의 해산과 함께 폐간되었다. <ref>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현대 문학/현대 전기 문학/개화기와 신문학의 태동#독립신문(獨立新聞)|독립신문(獨立新聞)]]〉</ref> 독립신문은 최초의 순[[한글]]체 신문이자 한국 최초의 영자신문이었으며, 신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칼럼을 투고할 수 있었다. [[1957년]] [[4월 7일]]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독립신문 창립일을 [[신문의 날]]로 지정하였다.
 
== 배경 ==
=== 창간 준비 ===
[[파일:Young Philip Jaisohn.jpg|섬네일|left|150px|[[서재필]]]]
 
[[1895년]] [[조선]]으로 귀국한 [[서재필]]은 [[조선]]에도 [[신문]]을 발행하여 국민을 계몽할 것을 계획한다. 동시에 [[신문]] 발간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유길준]], [[박정양]] 등은 서재필이 자신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를 적극 지지하고 [[대한제국 고종|고종]]에게 신문 발간을 건의하여 허락받는다.
 
[[1894년]] [[박영효]]를 만난 [[서재필]]은 다시 조선을 개혁해보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서재필은 [[박영효]]의 권유로 망명 10년 만인 [[1895년]] [[12월]] 배를 타고 [[하와이]]와 [[일본]] [[도쿄]]를 경유하여 [[조선]]으로 귀환하였다. 그는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본]]을 경유할 때 일본 [[도쿄|동경]]의 모교 [[토야마 사관학교]]를 방문하였고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났으며, 다시 일본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배편으로 [[12월 25일]] [[인천]]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파일:Yu Kil-chun.jpg|섬네일|right|150px|[[유길준]]]]
 
당시 내각을 맡고 있던 [[유길준]]은 [[서재필]]을 초빙형식으로 귀국시키는데 노력하였다.<ref name="omay0804">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73048</ref> [[서울대]] 사학과 명예교수 [[신용하]]에 따르면 갑신정변이 민중의 지지가 결여되었기에 실패했던 교훈을 되새긴 [[유길준]]은 민중을 계몽하는 사업으로 신문 창간이 절박했다. [[갑오경장]]이 [[개화파]] 내각의 주도로 제도 개혁을 하면서 [[일본]]측의 [[한성신보]]에 대항할 신문을 만들 [[한국인]]을 물색했는데, 그가 서재필이었다.<ref name="omay0804"/>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유길준]]은 [[유길준]] 대로 개혁과 민중을 계몽하는 사업으로 신문 창간이 절박했고<ref name="omay0804"/>, [[일본]]은 일본 대로 [[1895년]] 무렵부터 [[조선]]에 [[신문]] 창간을 후원한다는 명목으로 신문 개설을 권고하였고, 이에 내부대신 [[유길준]]은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의사 생활을 하던 필립 제이슨을 초빙하기에 이르렀다<ref name="omay0804"/>는 것이다.
 
서재필은 귀국 직후 신문 창간을 준비하였으나 [[일본]]의 협력 거부와 자금 조달의 어려움으로 실패하고 만다.
 
귀국 직후 시도했던 신문 간행이 [[일본]]에 의해 좌절될 뻔했을 때 서재필의 상심을 들어주던 유일한 대화 상대는 [[윤치호]]였다.<ref name="황293">이황직, 《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웅진), 2007) 93페이지</ref> [[윤치호]]는 [[아관파천]] 직후 신문 간행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던 서재필을 돕고 싶었지만, 이미 [[민영환]]을 수행해 [[러시아]]에 다녀오라는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명을 받았기에 도울 수 없었다.<ref name="황293"/> [[1895년]] 서재필은 [[유길준]]의 벼슬 권고를 사양하였다. '[[갑신정변]]이 민중에 뿌리를 박지 못해서 실패했다'고 느껴 민중 계몽 사업을 하겠다며 조용히 거절했다. 이후 [[서재필]]은 [[박영효]], [[박정양]] 등을 찾아가 신문 개설에 필요한 자금을 내줄 것을 호소하였다.
 
결국 [[1895년]] 봄, [[서재필]]은 신문 창립 비용으로 국고에서 3천원을 지원받고 별도의 정착 자금으로 1400원 등 4400원을 받았으며 월 300원씩 10년간 중추원 고문직을 맡기로 하였다.
 
=== 일본의 지원 ===
1895년 12월 3일, 일본 외무대신 무츠 무네미츠(陸奧宗光)는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카쿠고로(井上角五郞)에게 전보를 보낸다.
“신문 발간을 위해 말씀해 오신 그렇게 많은 돈을 지출하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하므로 이에 다시 한 번 절약․검소한 방법을 고려해 주기 바람. 또 신문기자는 첫째로 그 신문을 지배할 만한 인물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바, 나는 오다 이치로(織田一郞)에게 그 임무를 맡겼으면 한다. 이의 없는지 알고 싶다.”
 
1895년 12월 4일, 주한일본공사는 일본 외무대신에게 신문기자로 활동할 인물은 선정해 두었다는 중요한 전보를 보낸다.
"신문사 창립비는 최초의 설계는 조선의 기계류를 차용할 계획이었으나 그 가망이 없기 때문에 모두 다 새로 조달할 필요로 하기에 1200원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지금 물가가 4배나 올랐기 때문에 아무리 절검하여도 1천원은 필요하므로 꼭 1천원만은 지출해주기 바란다. 또 보조비는 전(前) 설계로는 160여 원을 요하겠지만 이것은 조선 정부 기타에 파는 것을 예상하여 130원으로 감액한 것이다. 이런 것까지의 전액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되지만 앞서 진술한 대로 물가가 매우 비싼 때인지라 만일의 부족을 염려하여 130원만은 꼭 청구해 주기 바란다. 또 신문기자의 건은 이쪽에서 이미 적당한 자를 선택해 놓았다. 이것은 제가 사용하는 자이므로 그 인선은 꼭 저에게 맡겨주시기 바람."
 
1895년 12월 5일, 일본 외무대신은 주한일본공사에게 한글 신문기자로 적합한 인물이 있는지 묻는 전보가 온다.
"오쿠다 요시토(奧田義人)를 출장시키기는 어려운 일인지라, 그 대신 내각의 하나부사 나오사부로(花房直三郞),시바타 카몬(柴田家門) 중 1명을 출장시키는 쪽으로 하고 싶으며, 그 사무는 오로지 내각의 조직과 각 성의 장정을 정하는 일에 사용할 계획이다. 또 오늘의 경우 민간인을 넣는 일은 사실 곤란하다. 지금 조선 정부는 빈곤하기 짝이 없어서 군대의 급료조차 4개월간이나 지불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민간에서 사람을 넣을 때는 즉시 급료 지불에 차질이 생길 것이다. 조선문(朝鮮文: 한글-필자 주)의 신문 발행의 일은 어떠한가? 기자로서 그 곳에 적당한 사람이 있으면 속히 답전하기 바란다."
 
1895년 12월 5일, 주한일본공사는 일본 외무대신에게 '한글 신문' 제작은 자신에게 맡겨 달라는 요청서를 전보로 보낸다.
"야스히로(安廣) 비서관은 오늘 아침 9시 인천을 출발하였다. 동 관이 도착할 때까지 체재하시기 바란다. 또 한글 신문의 일은 지급(至急)을 요하므로 저에게 일임시켜 주기 바람."
 
1895년 12월 6일, 주한일본공사는 일본 외무대신에게 한글 신문 창립비로 기밀비를 지불하고 싶다는 전보를 보낸다.
"하나부사(花房)․시바타(柴田) 가운데서 출장을 전의(詮議)하기가 어려우면 전 농상무성 특허국장으로서 지금 제2군을 수행중인 아루가 나가오(有賀長雄)를 파견하도록 조치하시기 바란다. 특히 동인의 봉급 지출의 길이 없음에 있어서 조선 정부의 재정 형편이 조정될 때까지는 별도 기밀금 65,000원내에서 지불할 것을 승낙하여 주시기 바람. 또 조선 신문의 창립 보조도 지출할 길이 없음에 있어서는 위 별도 기밀금 안에서 지불하고 싶다. 여하튼 지급 답전을 기다리겠음."
 
1895년 12월 6일, 일본 외무대신은 주한일본공사에게 신문사 창립비를 보낸다는 전보를 보낸다.
"신문 창립비 1200원은 지불하겠지만 그것은 돈으로 보내고, 기계 등은 그 곳에서 정비할 작정인지 답전하기 바람."
 
1895년 12월 7일, 주한일본공사는 일본 외무대신에게 신문 발행을 위한 기계를 구입하겠다는 전보를 보낸다.
"신문 발행에 있어 기계 등은 새로 조달할 작정이지만 코베(神戶)에는 고물로서 상당한 것이 있을 것이므로 대금을 혹 실감할지도 모른다. 더욱이 이를 위하여 이곳에서 사람을 차출할 작정임."
 
1895년 12월 7일, 일본 외무대신은 주한일본공사에게 신문사 창립비와 신문 제작을 위해 관리를 파견한다는 전보를 보낸다.
"신문 창립비 1200원을 전신환으로 보냈음. 화방․시전 가운데 한 사람을 히로시마(廣島)에 체재시킬 용무가 있다. 의회 개회 중 특히 분망할 것이므로 양인이 함께 귀하의 명에 응하기 어렵다. 따라서 종종 협의한 결과 법제국 참사관인 이시즈카 에이조(石塚英藏)라면 즉시 귀하의 명에 응할 것이다. 동인은 오랫동안 법제국에 있었다. 영문학에 능하고 일본 법률에도 정통하다. 그가 마땅하다면 전보하시는 대로 본인을 도한(渡韓)시키겠음."
 
일본공사는 본국의 훈령에 따라 [[유길준]], [[서재필]] 등에게 신문 발행에 협력할 것을 약속한다.
 
== 재연이돼지 신문이라는 점과 정치, 시사, 국제정세를 국민에게 알기 쉽게 소개한 점이 높이 평가된다. ==
독립신문의 창간자인 [[서재필]]이 일본 유학 시절에 접했던 [[후쿠자와 유키치]]의 《[[시사신보]]》와 미국 체류 당시에 접했던 주간지 《[[네이션]]》(Nation)이 독립신문의 발행 취지 및 방법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ref>이정식, 구한말의 개혁·독립투사 서재필, 212~213면, 2003년, 서울대학교 출판부</ref>
 
독립신문은 정치 공동체의 인적 구성 원리에 대해 기존 조선 시대의 방식과는 다른 이해 방식을 보여주고 이를 본격적으로 대중화시킨 최초의 신문이었다. 또한 토론과 비판을 통해 [[입헌군주제]] 등의 근대 정치공동체 건설을 위한 대안을 제시하였다. <ref> 서울대 정치학과 독립신문강독회, 《독립신문, 다시 읽기》, 푸른역사, 17~18면</ref>
 
독립신문은 청으로부터 독립을 의미하기 때문에 친일과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았다. 1898년 8월 20일자 독립신문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서울에 올 예정인데, 그는 세계적 정치가이고, 대한제국의 독립 사업에 대공이 있는 사람이므로 정부와 인민은 각별히 후대하기를 바란다는 사설을 실었다. <ref>권기봉,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난다, 알마, 2008년</ref>
 
== 독립신문사터 ==
 
독립신문사가 있었다는 곳에 대한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서울특별시 문화재과 표석위원회에서 [[배재학당]] 대강당 앞쪽 계단(정동 34-5번지)에 '독립신문사터' 표석을 설치하고 있으며, 오인환 전 연세대 교수는 [[정동제일교회]] 바로 건너편에 있는 '신아빌딩'(서소문동 39-1번지)이 독립신문사 자리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추정을 한다. 또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이순우는 [[서울시립미술관]] 안쪽(서소문동 38번지) 에 있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ref>이순우, [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52212 숨바꼭질하는 독립신문사 ‘출생지’], [[시사저널]]</ref>
 
== 기타 ==
 
1996년 [[LG상남언론재단]]은 이사장 [[안병훈]]의 주도로 독립신문 원본을 실물크기로 한데 묶은 독립신문 영인본을 발간했다. 총 1000질이 발간된 영인본은 전국 국공립 도서관과 근현대사 전공 교수들에게 기증되었다. 같은해 4월 4일부터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서재필 독립신문 특별전시회〉를 비롯 독립신문 창간 100돌과 관련한 각종 전시회에 영인본이 전시되었다.<ref>'독립신문 영인본 나왔다' 경향신문 1996년 4월 4일자 13면</ref>
 
== 같이 보기 ==
{{Col-begin}}
{{Col-2}}
* [[독립협회]] / [[독립문]]
* [[만민공동회]]
* [[서재필]]
* [[윤치호]]
* [[주시경]]
* [[박정양]]
* [[유길준]]
* [[아관파천]]
{{Col-2}}
* [[신문의 날]]
* [[경성신문]]
* [[한성순보]]
* [[황성신문]]
{{Col-end}}
 
== 참고 자료 ==
* 독립신문영인간행회, 《독립신문》 (독립신문영인간행회 편, 경인문화사, 1991)
* 독립신문강독회, 《독립신문 다시 읽기》 (푸른역사, 2004)
* 정진석, 《한국언론사연구》 (일조각, 1983)
* 김민환, 《개화기 민족지의 사회사상》 (도서출판 나남, 1988)
* 신용하, 《독립협회 연구, 상하》 (일조각, 2006)
* 윤치호, 《윤치호 일기 1916~1943》 (김상태 편역, 인물과 사상사, 2001)
* 최기영, 《대한제국기 신문연구》 (일조각, 1991)
* 유영렬, 《개화기의 윤치호 연구》 (한길사, 1986)
* 김유원, 《100년뒤에 다시읽는 독립신문》 (경인문화사, 1999)
 
== 각주 ==
<references/>
 
== 외부 링크 ==
* [http://www.mediagaon.or.kr/jsp/search/SearchGoMain.jsp?collection=GO 독립신문 검색] [[한국언론재단]]에서 독립신문을 온라인으로 제공한다.
* [http://www.mediagaon.or.kr/jsp/search/SearchGoDirMain.jsp?code=DLE 독립신문 영문판]
*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84 <nowiki>[</nowiki>역사 속의 인물<nowiki>]</nowiki> 독립신문과 송재 서재필] 매일신문 2011년 01월 09일자
 
[[분류:1896년 창간]]
[[분류:1899년 폐간]]
[[분류:대한제국의 신문]]
[[분류:대한제국의 정치]]
[[분류:서재필]]
[[분류:윤치호]]
[[분류:유길준]]
[[분류:대한제국 고종]]
[[분류:대한제국의 단체]]
[[분류:한국의 독립운동]]
[[분류:항일 매체]]
[[분류:한국어 신문]]
[[분류:영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