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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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케냐타 사망 이후 [[케냐의 부통령|부통령]]이었던 [[대니얼 아랍 모이]](Daniel arap Moi)가 예상을 깨고 권력 암투에서 승리해 케냐의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82년]] [[6월]] 개헌으로 케냐는 공식적으로 일당 체제가 되었다. 그 후 [[1991년]] [[12월]], 국민들의 요구로 일당 체제를 폐기하고 [[1992년]] 다당(多黨) 선거가 치러졌다. KANU가 과반수의 표를 획득하고 모이가 재선되었지만 야당도 의회석의 45%를 차지했다.
'''케냐 공화국'''({{llang|en|Republic of Kenya|리퍼블릭 오브 케냐}}, {{llang|sw|Jamhuri Ya Kenya|잠후리 야 케냐}}) 또는 '''케냐'''(Kenya, {{문화어|케니아}})는 [[동아프리카]]의 [[공화국]]이다.
 
[[인도양]]에 면해 있으며 북동쪽으로 [[소말리아]], 북쪽으로 [[에티오피아]]와 [[남수단]], 서쪽으로 [[우간다]], 남쪽으로 [[탄자니아]]와 국경을 맞닿고 있다.
 
[[수도]]는 [[나이로비]]이며 [[공용어]]는 [[영어]]와 [[스와힐리어]]이다. 케냐의 주요 종족은 [[키쿠유족]], [[루히아족]], [[루오족]], [[칼렌진족]], [[캄바족]], [[키시족]],[[메루족]] 등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어 각각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 [[백인]], [[인도인]], [[아랍인]] 등 비아프리카계 민족은 전체 인구의 1% 정도를 차지한다. 인구는 4,403만 명(2013년 7월,CIA 추정자료)이다.
 
== 역사 ==
[[동아프리카]]에서 발견된 화석에 따르면 조상이 2백만 년 전 이 지역에서 살았다고 한다. [[투르카나 호]] 근처에서의 최근 발굴에 따르면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와 같은 [[호미니드인]](hominid)이 260만 년 전 이 나라 땅에 있었다.
 
=== 독립 전의 케냐 ===
케냐의 식민 시대 역사는 [[1885년]] [[독일]]이 [[잔지바르]](현 [[탄자니아]]의 잔지바르 섬) [[술탄]]의 케냐 해안 영토에 보호령을 설치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 후 [[1888년]] [[영국 동아프리카 회사]]가 들어왔다. 독일이 해안 영토를 [[1890년]]에 [[영국]]에게 넘겨줘 두 열강 사이의 분쟁도 적지 않았다.
 
[[1952년]] [[10월]]부터 [[1959년]] [[12월]]까지 케냐는 영국의 지배에 대한 반란([[마우마우 반란]])으로 비상 사태하에 있었다. 영국은 단계적으로 케냐의 독립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957년]] 처음으로 아프리카인들이 피선거권을 가진 입법 회의 직접 선거를 치렀다. 그러면서 좀 더 온건한 세력에게 권력을 넘기려는 영국의 기대와는 달리 [[조모 케냐타]](jomo Kenyatta)가 이끄는 [[케냐 아프리카 국민연맹]](KANU, Kenya African National Union)이 독립 정부 조직을 주도하게 되었다.
 
=== 케냐의 독립 ===
[[1963년]] [[12월 12일]] 케냐는 독립을 선포했다. 1년 후 케냐타는 [[케냐의 대통령|케냐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케냐 인민연맹]](KPU, Kenya People's Union)이 정당 활동이 금지된 1969년 이후로는 KANU가 유일한 정당이었다.
 
=== 케냐가 자유화 되기까지 ===
[[1978년]] 케냐타 사망 이후 [[케냐의 부통령|부통령]]이었던 [[대니얼 아랍 모이]](Daniel arap Moi)가 예상을 깨고 권력 암투에서 승리해 케냐의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82년]] [[6월]] 개헌으로 케냐는 공식적으로 일당 체제가 되었다. 그 후 [[1991년]] [[12월]], 국민들의 요구로 일당 체제를 폐기하고 [[1992년]] 다당(多黨) 선거가 치러졌다. KANU가 과반수의 표를 획득하고 모이가 재선되었지만 야당도 의회석의 45%를 차지했다.
 
더 자유화 된 [[1997년]] 선거에서도 모이가 야당의 분열해 힘입어 재선되고 KANU도 간신히 과반수의 표를 획들했다. 그러나 헌법상 모이가 재선을 노릴 수 없게 된 [[2002년]] 대선에서는 야당이 연합하여 [[국민 무지개 연립]](National Rainbow Coalition, NARC)을 결성, [[므와이 키바키]]를 대표로 내세워 당선시켜 독립 후 계속되었던 KANU의 독주에 종지를 찍었다. 그 후 개헌 문제가 케냐 정치의 최대 현안이 되었는데 이 문제로 국민 무지개 연립은 분열되었고 [[2005년]]에는 므와이 키바키가 지지한 개헌안이 대통령의 권한을 충분히 억제하지 않는다는 논란 속에 국민투표 끝에 부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