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성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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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해 니 어미 조선족 대가리도 잘라버리지 뭐 평생 쫒아줄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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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강 (중국 성씨)}}
'''강'''(姜, 康, 強, 江, 剛)은 [[한국의 성씨]]이다.
== 姜 ==
강(姜)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1,176,847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6위이다. 본관은 문헌상으로 114본이 전하나, 이 중에서 시조를 알 수 있는 본관은 [[진주 강씨 (강이식)|진주]](晋州)·[[금천 강씨|금천]](衿川)·안동·배천(白川)·해미(海美)·동복(同福)·광주(光州) 7본이다.
'''[[진주 강씨 (강이식)|진주 강씨]]'''(晋州 姜氏) 시조 '''[[강이식]]'''(姜以式)은 [[고구려]] 병마도원수이다. [[597년]]([[고구려]] [[영양왕]] 8년)에 [[수 문종]]이 무례한 국서를 보내오자 [[영양왕]]은 군신을 모아 놓고 이에 회답할 것을 논의할 때 강이식은 이와 같은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양왕]]이 이에 수긍하고 싸울 것을 명하자 군사 정병 5만을 이끌고 [[임유관]](臨楡關)에서 [[수나라]] 군사 30만을 단번에 격퇴하고, 603년에 [[수 양제]]가 군사 100만으로 다시 침략할 때 중신회의에서 강화할 것을 논의했으나 이에 반대하고 싸울 것을 주장하여 [[을지문덕]]과 함께 요동성 살수([[청천강]]) 등의 싸움에서 수군을 대파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현재 중국 만주 심양현 원수림 역앞에 강이식 장군의 묘비가 있다. [[강이식]]의 후손 중에 신라 [[헌강왕]] 때 판내이령 '''강진'''(姜縉)이 진양후에 봉해지며 본관을 [[진주 강씨 (강이식)|진주]](晋州)로 하였다고 한다. [[진주 강씨]](晋州 姜氏)의 파는 박사공파, 인헌공파, 은열공파, 관서공파, 소감공파가 있다. 박사공파는 강사첨의 자녀에 따라 통정공파와 통계공파로 나뉜다.
'''[[금천 강씨]]'''(衿川 姜氏) 시조 '''강여청'''(姜餘淸)의 5대손인 강궁진(姜弓珍)은 금천(衿川)의 호족으로서 고려 통일에 협력한 공으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올랐다. 강궁진의 아들인 [[강감찬]](姜邯贊)이 [[983년]](고려 성종 3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요나라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며, 1030년(현종 21)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 康 ==
강(康)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91,625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56위이다. 본관은 신천, 곡산, 재령, 충원, 제주, 진주등 10여 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에 전한다.
* '''[[신천 강씨]]'''(信川 康氏)의 비조 강후(康候)는 중국 주나라 무왕의 아우 강숙(康叔)의 둘째 아들로서 기원전 198년에 [[고조선]] [[평양]]에 들어와 왕실을 교화한 공으로 [[기자 (고조선)|기자]]로부터 강씨 성을 받았다고 한다. 강후(康侯)의 67세손 고구려 유민 출신인 성골장군(聖骨將軍) '''[[강호경]]'''(康虎景)을 시조로 하고 있다. 중시조 '''[[강지연]]'''(康之淵)은 강호경의 14세손으로 [[고려 고종]] 때 호성공신에 오르고 신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신천 강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25명을 배출하였다. 2015년 인구는 52,945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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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강 강씨]]'''(永康 康氏) 시조 '''[[강증]]'''(康拯)은 고려 예종 때 병마판관(兵馬判官)을 지냈는데 여진정벌(女眞征伐)에 공이 있어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
강(強)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770명으로 조사되었다. 본관은 충주(忠州) 668명, [[괴산 강씨|괴산]](槐山) 57명, 상산 21명 등이 있다. 강(強)씨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충청도 충주목 괴산군의 토성으로 기록되어 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da_40005001_003 세종실록 149권, 지리지 충청도 충주목 괴산군]</ref>
『삼국사기』에 중원소경(中原小京 : 현 충주(忠州)) 출신의 [[강수 (신라)|강수]](强首)가 673년(문무왕 13) 사찬(沙湌)의 벼슬에 오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괴산 강씨]]'''(槐山強氏) 강의립(强義立)의 아들 강이민(强以敏, 1638년 ~ ?)이 우림위(羽林衞)로서 1670년([[조선 현종]](顯宗) 11년) 별시(別試) 무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ref>『경술추문무과별시방목(庚戌秋文武科別試榜目)』</ref> 강이민(强以敏)은 1680년 서천만호(舒川萬戶)를 지내고, 1703년(숙종 29년) 어유간 첨사(魚游澗僉使)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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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江)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34명으로 조사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전라도 [[압해읍|압해]](押海)의 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 剛 ==
1930년 국세조사에서 충청북도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에 강응룡(剛應龍) 1가구가 처음 나타났다. 그에 따르면 1908년(융희 2) 민적부(民籍簿)에 기재할 때 강(强)을 강(剛)으로 잘못 기록했다고 한다. 강(剛)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9명으로 조사되었다. 본관은 괴산(槐山)이 6명이다.
== 각주 ==
[[분류:강씨| ]]
[[분류: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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