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롱집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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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롱집단 개념에 대한 반대 설명 ==
천중몐(岑仲勉)은 이러한 관롱집단 개념에 대해 반대하며 "우문태를 따라 입관한 북족(北族)들이 비록 점점 하남군망(河南郡望)을 경조(京兆)로 고쳤다 하나 당나라 때 이미 그 하남군망을 대부분 회복하였고, 당나라 황실은 실제로는 조군(趙郡)에서 나왔으니 또한 농서에서 어떻게 거리낄 것이 있으며 고치지 않는 것을 견지하였겠는가? 천씨의 설명은 의심스러워 아직 믿을 수 없다.<ref name="岑仲勉1958">{{cite book|author=岑仲勉|title=隋唐史|volume=1|url=https://books.google.com/books?id=pt4lAAAAMAAJ&focus=searchwithinvolume&q=唐室如真出自趙郡|year=1958|publisher=文昌書局}}</ref>"라고 말했고, 또 "천씨가 반드시 승유(僧孺), 영호초(令狐楚)를 서위 이래 관롱집단의 밖에서 배출된 것이라고 하겠다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여 자신의 억견을 취하겠다는 것이다.<ref name="岑仲勉1979">{{cite book|author=岑仲勉|title=隋唐史|url=https://books.google.com/books?id=-t4lAAAAMAAJ&q=無非歪曲史實|volume=2|year=1979|publisher=文昌書局}}</ref>"라고 하였다. 왕롱쭈(汪榮祖)는 천중몐이 천인커가 말한 조주(趙州), 소경(昭慶) 이릉(二陵)과 《광업사비(光業寺碑)》에 대해 반증을 제출하지 못했으니 천인커의 설을 흔들 수는 없다고 하였다.<ref>《천인커평전(陳寅恪評傳)》</ref>
 
황융녠(黃永年)은 관롱집단이 서위, 북주, 수나라 초기에만 존재했고, 수 양제 때 정치적 중심지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원래 남조의 관료들이 들어와 북방의 관료들과 견제 및 균형을 이루었으므로 점차 쇠락, 해체되어 당나라 초기에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였다. 당 고조 시기의 공신, 재상 중 관롱 출신인 자는 반수에도 미치지 못하므로 하나의 집단이라고 일컫기에는 부족하다고 하였다.<ref>黄永年:《关陇集团到唐初是否继续存在》</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