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에 대한 새 관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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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 “라이트의 문제는 근원적으로 자기 나름의 독특한 성경 해석에 사로잡혀 전통적 성경 해석에 대한 비판이 너무 크게 나타나게 된 것”이라며 “‘새 관점’의 구원론은 기존의 구원론을 전적으로 뒤집는 것이고 이는 [[종교 개혁|종교개혁]]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연결된다”고 ‘새 관점’을 강하게 비판했다.<ref>[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07883 “종교개혁 구원론 뒤집는 ‘새 관점’은 과연 새로운가“, 입력: 크리스챤투데이 2010-04-13] </ref>
 
== 개혁신학적 관점에 대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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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잘 보면, 조직신학자와 성경신학자의 관심의 연도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직신학, 특별히 개혁주의 노선의 조직신학자들은 종교개혁으로부터 나온 사상, 즉 루터의 이신칭의나 칼빈의 예정론을 굳게 믿으며 그것을 신조로서 지키는 것에 관심이 큰 반면, 성경신학자들은 1세기 예수와 바울이 살던 그 시기의 기독교에 관심이 더 많다. 이 시기의 차이는 거의 1300-1700년이 된다. 즉, 두 학문 분야는 같은 주제를 가지고 전혀 다른 시간의 관점에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종교개혁의 신앙의 신조를 지키고 있는 한국의 보수적인 교회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라이트의 주장은 받아드려지기가 어렵다. 하지만, 문제는 학문의 분야에서 이러한 신조들이 별 힘을 못쓰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핵심은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다. 그 사건과 가장 밀접한 사태(보통 성경신학에서는 예수의 탄생 전후 200년을 주로 다루게 되며, 당연히 성경 텍스트 역시 이 분과에서 다룬다)를 다루는 학문이 성경신학이기 때문에 성경신학에서 최신 논의들이 이뤄지게 되면, 그것을 조직신학에서 학문적으로 반박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예를 들어 조직신학은 특별히 개신교의 조직신학은 16세기의 종교개혁을 통해 형성이 되었는데, 이것이 도그마 즉 신조로 굳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1세기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연구들과 논문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면, 이러한 신조들과 도그마들은 수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를 다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신조들과 도그마를 수정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간단한 일이 아니며, 특히나 리더쉽에 분산되어 있는 개신교에서는 불가능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한국의 조직신학자들이 라이트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책을 써도, 학문적으로는 딱히 받아드려지지 않거나, 성경신학자들은 그러한 책에는 거의 관심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