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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0년에 신라에서 활동한 신하 중에는 왜 출신인 자(호공, 瓠公)도 있었다. 그렇지만, 신라는 건국 초부터 왜의 침범에 시달린 것이 역력하다. 이들은 신라출신이 아닌 가야 또는 백제 등 다른 나라 출신으로서 대부분이 대마도 규슈 북부 또는 가야국에 근거를 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ref>{{서적 인용 | 저자 = 김용운 |제목= 천황이 된 백제의 왕자들 |출판사=한얼사 |연도=2010 |쪽=45 |id = {{ISBN|978-89-89148 32-6}} |인용문 = 『삼국사기』「신라본기」의 기록에는 신라는 건국 초부터 왜의 침범에 시달린 것이 역력합니다. 이들은 신라출신이 아닌 가야 또는 백제 등 다른 나라 출신의 왜였을 것입니다. 즉 신라를 침범한 왜는 이즈모에서 온 것이 아니라 대부분이 대마도 규슈 북부 또는 가야국에 근거를 두는 왜였을 것입니다. }}</ref> 서기 [[14년]](남해차차웅 11년)에 왜인이 병선 백여 척을 보내 신라의 바닷가의 민가를 노략질하였으므로, 신라는 6부의 날랜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막았다. [[158년]](아달라 이사금 5년) 음력 3월에 왜인이 신라에 내빙하였다. [[173년]](아달라 이사금 20년) 음력 5월, 왜국의 여왕 [[히미코]]가 사신을 보내 신라에 내빙하였다. [[193년]](벌휴 이사금 10년), 음력 6월, 왜인이 크게 굶주려 신라에 와서 먹을 것을 구하는 자가 천여명이었다. [[232년]](조분이사금 3년) 음력 4월에는 [[왜]]가 신라의 수도 [[금성]]을 포위하니, [[조분 이사금]]이 친정하여 왜적을 격퇴하고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233년]](조분이사금 4년) 음력 5월 왜가 다시 신라의 동쪽을 노략하니 음력 7월에 이찬 [[석우로]]가 사도(沙道)에서 왜인과 싸우는데, 화공으로 왜인들의 배를 불태우고 적병을 수장시켰다. 내물 마립간 때에도 해안가로 왜구의 침입을 많이 당하였다. [[364년]] 음력 4월 [[왜]]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쳐 왔는데, [[토함산]] 아래에 허수아비 수천 기를 세워 마주하게 하였다. 왜병은 수가 많은 것을 믿고 달려들다가 신라 복병에 걸려 크게 패했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03/내물 이사금|본기 권3 내물 이사금]] |인용문= 九年 夏四月 倭兵大至 王聞之 恐不可敵 造草偶人數千 衣衣持兵 列立吐含山下 伏勇士一千於斧峴東原 倭人恃衆直進 伏發擊其不意 倭人大敗走 追擊殺之幾盡 (9년 여름 4월에 왜의 군사가 대거 이르렀다. 왕이 듣고서 대적할 수 없을까 두려워 풀로 허수아비 수천 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서 토함산 아래에 나란히 세워 두었다. 그리고 용맹한 군사 1천 명을 부현(斧峴)의 동쪽 들판에 숨겨놓았다. 왜인이 자기 무리가 많음을 믿고 곧바로 나아가자 숨어 있던 군사가 일어나 불의에 공격하였다. 왜군이 크게 패하여 달아나므로 추격하여 그들을 거의 다 죽였다. )}}</ref> [[393년]] 음력 5월 왜인이 크게 쳐와 [[금성]]을 포위하고 닷새가 되도록 풀지 않았다. 장병들이 나가 싸우기를 청하는데 이사금이 거부, 적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농성하였다. 적이 퇴각하자 2백 기병으로 퇴로를 막고 보병 1천을 내보내 협공하여 크게 이겼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03/내물 이사금|본기 권3 내물 이사금]] |인용문= 三十八年 夏五月 倭人來圍金城 五日不解 將士皆請出戰 王曰今賊棄舟深入 在於死地 鋒不可當 乃閉城門 賊無功而退 王先遣勇騎二百 遮其歸路 又遣步卒一千 追於獨山 夾擊大敗之 殺獲甚衆(38년 여름 5월에 왜인이 와서 금성(金城)을 에워싸고 5일 동안 풀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지금 적들은 배를 버리고 [육지] 깊숙이 들어와 사지(死地)에 있으니 그 칼날을 당할 수 없다'고 말하고 성문을 닫았다. 적이 아무 성과없이 물러가자 왕이 용맹한 기병 200명을 먼저 보내 돌아가는 길을 막고,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獨山)까지 추격하여 양쪽에서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ref>
 
그리고, [[가락국]]은 [[왜]]에 [[철]]을 공급하였다.<ref name="ReferenceD">{{서적 인용 |제목= 유물로 읽는 우리 역사 | 저자= [[이덕일]] |연도= 1999 |출판사=세종서적 |쪽= 18 |id={{ISBN|89-8407-020-3}} |인용문= 서기 3세기 경의 정황을 전해주는 『삼국지』위서 동이전 한(韓)조에는 이런 기록이 나온다. "국(國)에서 철을 생산하는데 한, 예, 왜가 모두 와서 철을 얻어간다. 장사지낼때에는 철을 사용하는데 이는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또 철을 두 군(낙랑군․대방군)에 공급한다." 여기서 '국(國)'이 어디를 뜻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문맥상 가야가 위치했던 변한일 가능성이 높다. 그 중에서도 김해의 구야국(가락국)이 가장 유력한 후보이다. }}</ref>
 
==== 백제와 왜의 교류(4세기 ~ 6세기) ====
[[파일:Chiljido.jpg|200px|섬네일|칠지도]]
고구려·신라·백제가 분립하였던 삼국시대는 7세기까지 계속되었고, [[왜]]([[고훈 시대]], 250년 ~ 538년)는 백제와의 외교 관계를 6세기 무렵까지 계속하였다. 왜는 백제로부터 [[일본의 불교|불교]](6세기)와 [[한자]](4세기) 등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며 [[아스카 시대|아스카 문화]](538년 ~ 710년)를 꽃피웠고 백제는 신라와의 전쟁 때(7세기) [[왜]]로부터 군사인력을 제공받은 것으로 보인다. [[근초고왕]](재위 346년 ~ 375년)은 왜와 국교를 수립하고 많은 선진 문화를 전했다.<ref group="주해">이 일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엔 전무하고,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전한다. 현재 남아있는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근초고왕 즉위부터 20년(365)까지의 기록이 빠져 있다. 때문에 그 사이에 근초고왕이 무슨 일을 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ref> 백제가 언제부터 왜와 통교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근초고왕대에 이르러 양국은 활기차게 적극적인 교류를 하였다.<ref>{{서적 인용 |제목=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증보판) | 저자= 박영규 |연도= 2004 |출판사=웅진닷컴 |쪽=140~141|id={{ISBN|89-01-04751-9}} |인용문= 근초고왕은 왜와 국교를 수립하고 많은 선진 문화를 전했다. 백제가 언제부터 왜와 통교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근초고왕에 이르러 양국 관계가 활기를 띤 것만은 분명하다. }}</ref> 백제와 왜의 국교 수립은 서기 366년([[진구 황후]] 46년, 근초고왕 21년)<ref group="주해">《[[일본서기]]》[[진구 황후]] 46년조에 초고왕(肖古王)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는데, 여기서 신공황후 46년은 [[이주갑인상]]에 따르면 서기 366년으로 근초고왕 21년에 해당한다.</ref> 에 이뤄졌다.<ref>{{서적 인용 |제목=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증보판) | 저자= 박영규 |연도= 2004 |출판사=웅진닷컴 |쪽=140~141|id={{ISBN|89-01-04751-9}} |인용문=백제와 왜의 국교 수립은 신공황후 46년(서기 366년)에 이뤄졌다. }}</ref> 이처럼 왜는 정치적으로 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백제로부터 우수한 선진문물을 수입하고, 또 한반도로부터 많은 기술자와 농민이 도래하여 각종 기술을 전하는 등<ref>{{서적 인용 | 저자 = 연민수 |제목= 일본역사 |출판사=보고사 |연도=1998 |쪽=29 |id = {{ISBN|89-86142-81-3}} |인용문=4세기말 이후가 되면 정치적으로 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백제로부터 우수한 선진문물을 수입하고, 또 한반도로부터 많은 기술자와 농민이 도래하여 각종 기술을 전했다. }}</ref>, 백제의 일본 문화 전파는 다방면에서 이루어졌다. [[근초고왕]] 때 유교경전에 밝은 [[아직기]](阿直岐)가 일본의 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쳤고, 이후 박사 [[왕인]](王仁)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고 경사를 가르쳤다.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데 있어 유교적 이념은 다른 토착신앙이나 불교보다도 많은 것을 제공했기 때문에, 각 국가들은 고대 사회의 형성기에 유교 사상의 수입에 적극적이었다.<ref>{{서적 인용 |제목= 이야기 한국고대사(고조선에서 발해까지, 우리 역사를 찾아서) | 저자= 조법종 |연도= 2007 |출판사=청아출판사 |쪽= 210 |id={{ISBN|978-89-368-0359-9}} |인용문= 백제의 일본 문화 전파는 다방면에서 이루어졌다. 4세기 중엽인 근초고왕 때에는 유교경전에 밝은 아직기(阿直岐)가 일본의 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쳤고, 이후 박사 왕인(王仁)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고 경사를 가르쳤다.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데 있어 유교적 이념은 다른 토착신앙이나 불교보다도 많은 것을 제공했기 때문에, 각 국가들은 고대 사회의 형성기에 유교 사상의 수입에 적극적이었다. }}</ref> 당시 백제가 [[왜]]에 보낸 [[칠지도]]는 양국의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 중의 하나이다. 백제는 [[근초고왕]] 시기 때부터 [[섬진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하구에 위치한 [[하동]]을 대왜교역의 거점으로 확보하였다. 백제는 초기에 한성에서 천안을 거쳐 금강상류로 와서 남원에서 섬진강을 타고 하동으로 가는 교역로를 확보하였다. 하동에서 [[쓰시마 섬]]을 축으로 해서 [[이키 섬]], 그리고 [[규슈]]의 [[마쓰우라 반도]]에 이르는 길과 [[쓰시마 섬]]에서 오키노시마(沖ノ島), [[후쿠오카현]] 북쪽 해안에 이르는 길이 생겨났다.<ref name="ReferenceE">도민을 위한 백제의 역사와 문화, 2006년,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ref>
 
고구려 [[장수왕]](재위: 412년 음력 10월~491년 음력 12월)의 군사들이 한성으로 남침해 [[개로왕]]이 살해(475년)<ref name="Referenc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5/개로왕|본기 권25 개로왕]] |인용문= 二十一年...王出逃 麗將桀婁等見王 下馬拜已 向王面三唾之 乃數其罪 縛送於阿且城下戕之(21년(475년)... 왕이 [성을] 나가 도망가자 고구려의 장수 걸루(桀婁) 등은 왕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에 왕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꾸짖었다. [그리고는] 왕을 포박하여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ref> 되고, 왕자인 [[문주왕]](재위 475년~477년)은 위기에 빠진 백제를 구하기 위한 숱한 고민 끝에, 목만치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여기서 "남쪽"이 일본을 뜻한다고 하는 견해들이 있다.<ref name="ReferenceG">{{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5/개로왕|본기 권25 개로왕]] |인용문= 二十一年... 文周乃與木劦滿致·祖彌桀取 木劦·祖彌皆複姓 隋書以木劦爲二姓 未知孰是 南行焉 (21년(475년) 문주는 이에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 <목협(木劦)과 조미(祖彌)는 모두 복성(復姓)이었다. 수서(隋書)에는 목협을 두개의 성(姓)으로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ref><ref name="ReferenceH">{{서적 인용 |저자=정윤미 |제목=일본에 고함(KBS 국권 침탈 100년 특별기획) |연도= 2011 |출판사=시루 |위치=|id={{ISBN|978-89-966493-2-8}} |쪽= 31 |인용문 = 비상시국에 군주의 자리에 오른 문주왕은 자신이 신뢰하는 한 신하에게 특명을 내린다. 위기에 빠진 백제를 구하기 위한 숱한 고민 끝에 나온 복안이었다. 그 신하의 이름이 바로 목협만치(木劦滿致)였다. ...말 그대로 문주왕은 목협만치를 남쪽으로 보냈고 그가 향한 남쪽은 바다 건너 섬나라, 즉 일본을 뜻했다.}}</ref><ref name="ReferenceI">{{서적 인용 |저자=KBS역사스페셜 |제목=역사스페셜3 |연도= 2001 |출판사=효형출판 |위치=|id={{ISBN|89-86361-55-8}} |쪽= 84 |인용문 = 소가노의 증조부는 백제에서 건너왔는데 한국에서는 목협만치(木劦滿致, ‘목례만치’라고도 함), 일본에서는 소가노 만치라고 한다. 『삼국사기』엔 개로왕(蓋鹵王) 21년 (475) 백제가 고구려의 침략을 받은 위급한 상황에서 이 목협만치가 개로왕의 아들 문주와 함께 웅진으로 천도한 것으로 나온다. }}</ref>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목만치는 일본에 건너가 성(姓)을 바꾸어 [[소가노 마치]]라는 이름의 귀족이 된다.
 
[[파일:Sumida Hatiman Mirror.JPG|섬네일|200px|스다하치만 동경]]
현존하는 [[스다하치만 신사 인물화상경|인물화상경]](5~6세기)은 [[백제 무령왕]](재위 501년~523년)이 [[게이타이 천황]](재위 507년 ~ 531년)에게 선물로 보낸 거울인데, 이것은 백제와 [[왜]]의 친밀한 사이를 증명한다. 무령왕은 [[513년]]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ref name="ReferenceJ">{{서적 인용 |제목=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卷第十七|卷第十七 繼體天皇]] |인용문=七年夏六月 ... 貢五經博士段楊爾。}}</ref> 와 [[516년]] [[고안무]](高安茂)<ref name="ReferenceK">{{서적 인용 |제목=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卷第十七|卷第十七 繼體天皇]] |인용문=十年夏五月 ... 別貢五經博士漢高安茂、}}</ref> 를 일본에 보내어 [[백제]]의 문화를 일본에 전해주기도 하였다. 무령왕의 왕위를 계승한 [[성왕 (백제)|성왕]](재위 523 ~ 554년)도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이어갔다. 성왕 때, 백제는 일본에 불교를 전파했다(538년).<ref name="ReferenceL">{{서적 인용 |저자= 이은직 |기타= 정홍준 역 |제목= 조선명인전 |연도= 2005 |출판사= 일빛|id={{ISBN|89-5645-088-9}}|쪽= 28 |인용문= 백제는... 538년에는 불교를 전파했다.}}</ref> 성왕은 [[긴메이 천황]](재위 539년 ~ 571년)에게 사신과 함께 불상 및 불경을 보냈다. 이때 백제에서 건너온 물품 속에는 불교의 교리는 탁월하나 난해하고, 그것을 믿으면 무한한 복이 있을 것이라는 편지도 있었다.<ref name="ReferenceM">{{서적 인용 |제목= 세계 종교사 입문 | 저자=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도= 2003 |출판사=청년사 |쪽= 229 |id={{ISBN|89-7278-376-5}} |인용문= 일본에 불교가 도입된 것은 538년 C.E(일설에는 552년 C.E.)이다. 당시의 일본 왕 긴메이(欽明) 천황이 백제의 성왕(聖王 또는 聖明王)이 사신과 함께 보내온 불상 및 불경을 받은 것이 그 시초였다. 이때 백제에서 건너온 물품 속에는 불교의 교리는 탁월하나 난해하고, 그것을 믿으면 무한한 복이 있을 것이라는 편지도 있었다고 한다.}}</ref> 불교의 수용을 둘러싸고 왜국 조정은 큰 소용돌이에 빠졌다. 긴메이 천황과 [[소가노 마치]]의 후손이자 호족인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는 불교를 수용하려 했으나 또다른 호족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와 나카토미노 가마소(中臣鎌子)가 이에 반대하였으므로, [[긴메이 천황]]은 둘 사이에서 시달리게 되었다.<ref name="ReferenceN">{{서적 인용 |저자=[[이덕일]] |제목=우리 역사의 수수께끼3 |연도= 2004 |출판사=김영사 |위치=|id={{ISBN|89-349-1654-0}} |쪽= 74 |인용문 = 백제에서 전해 준 불교는 그 수용을 둘러싸고 왜국 조정에 큰 소용돌이를 몰고 온다. 긴메이천황과 호족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는 수용하려 했으나 또다른 호족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와 나카토미노 가마소(中臣鎌子)가 반대했다. }}</ref><ref>{{서적 인용 |저자=[[홍윤기 (1957년)|홍윤기]] |제목=일본 천황은 한국인이다 |연도= 2000 |출판사=효형출판 |위치=|id={{ISBN|89-86361-32-9}} |쪽= 92 |인용문 = 그 당시(538년) 최고대신 소가노 이나메(소가노 우마코 대신의 아버지)는 성왕이 보내준 금동석가상을 자신의 저택에 모셔다 놓고, 자택을 코우겐지〔向原寺 〕로 삼았다. 이 무렵 국신파였던 모노노베노 오코시 〔物部尾輿, 모노노베노 모리야의 아버지〕대련(大連)이 조정에서 불교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백제인 킨메이 천황은 본국에서 성왕이 불교 신앙을 권유했기 때문에 몹시 곤혹스러워졌다. 즉 불교 신앙에 열성적인 최고대신 소가노 이나메와 국신파인 제2위의 장관 모노노베노 오코시의 양 파 사이에 끼여 적잖게 시달리게 되었다.}}</ref> 그리고, 백제는 석가불금동상 1구, 번개(幡蓋) 약간, 경론(經論) 약간권을 딸려서 달솔 [[노리사치계]](怒唎思致契) 등을 일본에 파견(552년)하였다.<ref name="ReferenceO">{{서적 인용 |제목=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卷第十九|卷第十九 欽明天皇]] |인용문=十三年...冬十月、百濟聖明王、更名聖王。遣西部姬氏達率怒唎斯致契等、獻釋迦佛金銅像一軀・幡蓋若干・經論若干卷。 (13년(552년) 겨울 10월, 백제의 성명왕(혹은 성왕이라고도 한다)이, 서부달솔 희씨 노리사치계를 보내어 석가불금동상 1구와 깃발 약간, 경전 여러 권을 보냈다. }}</ref> 이 번개는 그 장엄함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일본서기]]》에 기록될 정도이므로 보통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ref name="ReferenceP">{{서적 인용 | 저자 = 고유섭 |제목= 구수한 큰맛 |출판사=다할미디어 |연도=2005 |쪽=160 |id = {{ISBN|89-89988-24-1}} |인용문 = 원래 백제의 공예는 고도로 발달되었나니, 성왕 3년에 일본에 전한 번개(幡蓋)는 그 장엄함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일본 정사에 특히 그 기록이 실려 있는 것만 보더라도 보통이 아니었음을 알겠고, ...}}</ref> 552년에는 사원 건설을 위해, 많은 학자와 기술자를 비롯하여 의사나 음악가까지 파견하였다.<ref name="ReferenceQ">{{서적 인용 |저자= 이은직 |기타= 정홍준 역 |제목= 조선명인전 |연도= 2005 |출판사= 일빛|id={{ISBN|89-5645-088-9}}|쪽= 28 |인용문= 552년에는 사원 건설을 위해, 많은 학자와 기술자를 비롯하여 의사나 음악가까지 파견하였다. }}</ref> 이렇게 성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도록 하였으며 성왕은 또한 의박사{{.cw}}역박사 등의 전문가와 기술자를 교대로 파견하여 일본에 선진문물을 전파하는 데 기여하였다.
 
[[파일:Prince Shotoku.jpg|섬네일|200px|백제로부터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쇼토쿠 태자]]와 동생(왼쪽: 에구리 황자)과 장남(오른쪽: 야마시로 황손),8세기 목판 복제]]
[[위덕왕 (백제)|위덕왕]](재위 554년 ~ 598년) 때에도 교류가 이어졌다. 577년(위덕왕 24년, 비다쓰 천황 6년)에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경론 몇 권, 대대적인 학자와 율사·선사·비구니·주금사 등 승려 집단, 불상 만드는 기술자, 사찰을 지을 목수들이 파견되었다.<ref name="ReferenceR">{{서적 인용 |제목=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卷第二十|卷第二十 敏達天皇]] |인용문=六年...冬十一月庚午朔、百濟國王、付還使大別王等、獻經論若干卷、幷律師・禪師・比丘尼・呪禁師・造佛工・造寺工、六人。遂安置於難波大別王寺。 }}</ref>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절과 부처 등을 만들었다.<ref name="ReferenceS">{{서적 인용 |제목= 야사로 보는 삼국의 역사1 | 저자= 최범서|연도= 2006 |출판사=가람기획 |쪽=166 |id={{ISBN|89-8435-241-1}} |인용문= 그 후 위덕왕 24년에 백제왕이 경론 몇 권, 율사律師 · 선사禪師 · 비구니 · 주금사呪噤師 · 조불공造佛工 · 조사공造寺工 등 6명을 보내었다.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절과 부처 등을 만들었다. }}</ref> 그 뒤, 금속공예사, 기와 굽는 기술자들까지 건너갔다.<ref name="ReferenceT">{{서적 인용 |저자= 최용범 |기타= |제목=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날짜=2008 |출판사=페이퍼로드 |id={{ISBN|978-89-92920-16-2}}|쪽= 48 |인용문=백제는 그 뒤 577년(위덕왕 24년)에 불상 만드는 기술자, 절 건축자를 보냈고, 이어 금속공예사, 기와 굽는 기술자까지 보냈다. }}</ref> 신라에서도 579년에 승려와 불상을 보냈다.<ref name="ReferenceU">{{서적 인용 |저자= 이은직 |기타= 정홍준 역 |제목= 조선명인전 |연도= 2005 |출판사= 일빛|id={{ISBN|89-5645-088-9}}|쪽= 28 |인용문= 백제는... 이어서 577년에는 대대적인 학자와 승려 집단, 불상 및 사찰을 지을 목수들이 건너갔고, 신라에서도 579년에 승려와 불상을 보냈다. }}</ref> 583년에는 [[비다쓰 천황]]의 요청으로 고승 [[일라]](日羅)가 건너갔다.<ref name="ReferenceV">{{서적 인용 |제목=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卷第二十|卷第二十 敏達天皇]] |인용문=十二年... 今在百濟火葦北國造阿利斯登子達率日羅、賢而有勇。... 冬十月、紀國造押勝等、還自百濟。復命於朝曰、百濟國主、奉惜日羅、不肯聽上。 }}</ref><ref name="ReferenceW">{{서적 인용 |제목= 한국인의 윤리사상사 | 저자= 이기영 |연도= 2000 |출판사=학문사 |쪽=132 |id={{ISBN|89-467-1092-6}} |인용문= 위덕왕... 30년(583)에는 일본왕의 요청으로 고승 일라(日羅)가 건너갔으며, ... }}</ref> 584년 백제는 다시 왜국에 불상 1구와 미륵상 1구를 보냈다.<ref name="ReferenceX">{{서적 인용 |제목=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卷第二十|卷第二十 敏達天皇]] |인용문=十三年... 秋九月、從百濟來鹿深臣、闕名字。有彌勒石像一軀。佐伯連、闕名字。有佛像一軀。 }}</ref> 이때 대신으로 있던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551년?~626년)는 소가노 이나메의 아들이었는데, 우마코도 부친 소가노 이나메의 불교 수용에 대한 유언에 따라 이 불상을 받아들이려 했다.<ref name="ReferenceY">{{서적 인용 |저자=[[이덕일]] |제목=우리 역사의 수수께끼3 |연도= 2004 |출판사=김영사 |위치=|id={{ISBN|89-349-1654-0}} |쪽= 76 |인용문 = 약 30년 후인 비다쓰(敏達)천황 13년(584)에 백제의 위덕왕(威德王)은 다시 왜국에 불상 1구와 미륵상 1구를 보냈다. 이때 대신으로 있던 소가노 이나메의 아들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도 부친처럼 이 불상을 받아들이려 했다. 소가노 우마코는 아버지로부터 불교를 수용하라는 유언을 받은 터였다.}}</ref> 588년(위덕왕 35년)에 백제는 불사리(佛舍利)와 승려 여섯 명, 노반박사(鑪盤博士)로서 [[장덕 (관직)|장덕]](將德) 백매순(白昧淳), 와박사(瓦博士)로서 마나문노(麻奈文奴){{.cw}}양귀문(陽貴文){{.cw}}석마제미(昔麻帝彌) 등 네 명, 화공(畵工) 한 명 등 사찰 건설에 필요한 기술자를 일본에 파견하여 백제의 공예미술이 일본에 널리 전파되었다.<ref name="ReferenceZ">{{서적 인용 |제목=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卷第廿一|卷第廿一 用明天皇 崇峻天皇]] |인용문=崇峻天皇 ... 元年春三月、... 百濟國遣恩率首信・德率蓋文・那率福富味身等、進調幷獻佛舍利、僧聆照律師・令威・惠衆・惠宿・道嚴・令開等、寺工太良未太・文賈古子・鑪盤博士將德白昧淳、瓦博士麻奈文奴・陽貴文・㥄貴文・昔麻帝彌、畫工白加。 }}</ref><ref>{{서적 인용 | 저자 = 고유섭 |제목= 구수한 큰맛 |출판사=다할미디어 |연도=2005 |쪽=160 |id = {{ISBN|89-89988-24-1}} |인용문 = 원래 백제의 공예는 고도로 발달되었나니, ... 위덕왕 35년에 노반박사(露盤博士)로서 장덕(將德){{.cw}}백미순(將德白味淳)의 도일, 와박사(瓦博士)로서 마나부노(麻奈父奴){{.cw}}양귀문(陽貴文){{.cw}}석마제미(昔麻帝彌)의 도일 등 백제의 공예미술이 널리 전파된 것을 알겠다.}}</ref><ref>{{서적 인용 |제목= 고대로부터의 통신 | 저자=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 분과 |연도= 2004 |출판사=푸른역사 |쪽=285 |id={{ISBN|89-87787-79-6}} |인용문= 《일본서기》에 따르면, 민달천황 敏達天皇 원년(588)에 백제가 불사리佛舍利와 승려 여섯 명, 노반박사 露盤博士 한 명, 와박사 네 명, 화공畵工 한 명 등 사원 건설에 필요한 기술자를 일본에 파견하였다고 한다. }}</ref> [[소가노 우마코]]는 불교 수용에 적극적인 성향을 보여, 마찬가지로 불교 수용에 관심을 보이던 [[쇼토쿠 태자]]와 연대하여, 불교 수용에 반대하는 배불파(排佛派)이자 국신파(國神派)인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와 정쟁을 되풀이한 끝에 승리를 거두어 오무라지(大連)인 모노노베 씨를 타도하고 중앙 권력의 정점에 섰다. 모노노베 씨는 [[백제]]에서 불교까지 들어온다면 자기네의 선주(先住) 신앙과 조정에서의 세력이 더욱 약화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ref>{{서적 인용 |저자=[[홍윤기 (1957년)|홍윤기]] |제목=일본 천황은 한국인이다 |연도= 2000 |출판사=효형출판 |위치=|id={{ISBN|89-86361-32-9}} |쪽= 87 |인용문 =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오랜 세월 인내와 투쟁 속에서 배불파(排佛派)의 우두머리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 515~587〕일당을 섬멸시킨 것이다. 조정의 제2위의 장관이던 모노노베노 모리야는 이른바 국신파(國神派)였다. 그러므로 백제에서 불교까지 들어온다면 자기네의 선주(先住) 신앙과 조정에서의 세력이 더욱 약화될 것을 우려해서 불교를 신봉하는 소가노 우마코에게 대립한 것이다. }}</ref> 602년 [[관륵]](觀勒)이 [[일본]]에 건너가 [[천문]]·[[책력]]·[[지리]]·둔갑방술(遁甲方術) 등에 관한 많은 책을 전하고, 불교를 전파하였다.<ref>{{서적 인용 |제목=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卷第廿二|卷第廿二 推古天皇]] |인용문=十年... 冬十月、百濟僧觀勒來之。仍貢暦本及天文地理書、幷遁甲方術之書也。是時、選書生三四人、以俾學習於觀勒矣。 }}</ref>
 
====신라와 왜의 대립과 갈등 (7세기 초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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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강 전투에서 패한 뒤 일본은 백제의 멸망으로 대거 유입된 난민들을 수용하였다. 일본의 황자 [[덴지 천황|나카노오에]]는 나당연합군의 침략 위협에 대한 공포로 방어 전쟁을 준비하였다. 즉, 쓰시마(対馬){{.cw}}이키(壱岐)와 북큐슈의 각지에 사키모리(防人, 변경수비대)와 봉수를 설치하고, 북규슈에 평지성인 미즈키(水城)을 축조하였다. 또 쓰시마로부터 북큐슈, 기나이의 왕도에 이르는 국방상의 요새에 망명해온 백제 유민들로 하여금 [[오노 성]](大野城, 665년)<ref>{{서적 인용 |제목=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 日本書紀/卷第廿七|卷第廿七   天智天皇]] |인용문= 四年…十二月…秋八月。…遣達率憶禮福留。達率四比福夫於筑紫國築大野及椽二城。}}</ref> 과 카네다 성(金田城, 667년)<ref>{{서적 인용 |제목=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 日本書紀/卷第廿七|卷第廿七   天智天皇]] |인용문= 六年…十一月…是月。築倭國高安城。讃吉國山田郡屋嶋城。對馬國金田城。}}</ref> 이라는 조선식 산성<ref group="주해">산성은 이전 일본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방어시설물로서 백제 망명세력의 지도하에 축조되는데 이를 조선식산성이라 부른다.</ref> 을 축조하고 북큐슈에는 군정기관으로서 [[다자이후]](大宰府)를 설치하였다.<ref>{{서적 인용 | 저자 = 연민수 |제목= 일본역사 |출판사=보고사 |연도=1998 |쪽=46 |id = {{ISBN|89-86142-81-3}} |인용문= 나당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쓰시마(対馬){{.cw}}이키(壱岐)와 북큐슈의 각지에 사키모리(防人, 변경수비대)와 봉수를 설치하고, 북규슈에 평지성인 미즈키(水城)을 축조하였다. 또 쓰시마로부터 북큐슈, 기나이의 왕도에 이르는 국방상의 요새에 조선식산성<sup>6 )</sup>이라 불리는 산성을 축조하고 북큐슈에는 군정기관으로서 다자이후(大宰府)를 설치하였다. … 6) 산성은 이전 일본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방어시설물로서 백제 망명세력의 지도하에 축조되는데 이를 조선식산성이라 부른다. }}</ref> 이와 같이 왜는 신라나 당과의 대립은 깊어졌다. 그러나 또한 한반도의 새로운 패권 세력인 신라와 친해지지 않으면 신라와 당의 연합이 왜국을 크게 위협할 수도 있다는 판단 아래, 왜는 서둘러 [[665년]]부터 신라와의 국교를 정상화하고, 왜의 중신이던 [[나카토미노 가마타리]]가 나서서 신라의 문무왕과 함께 신라 조정의 실력자였던 [[태대각간]] [[김유신]]에게 선물 공세를 취하는 등, 8세기 초까지 당과는 거의 교류를 하지 않으면서도 신라와의 교류에는 적극적이었다. 이는 훗날, [[원효]]나 [[의상 (신라)|의상]] 등의 신라 승려들이 나중에 신라 본국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해질 수 있는 정치·외교사적 배경이 되었다고 여겨진다.<ref>{{뉴스 인용 |저자 = [[박노자]] |제목 = 구원병 자격으로 한반도를 찾았던 왜군 |url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5145.html |출판사 = 한겨레21 제764호 |날짜 = 2009-06-12 |인용문 = 그리하여 백제 부흥운동 세력들이 완전히 패배하자 왜국은 서둘러 665년부터 신라와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그 뒤로는 신라의 실력자 김유신에게 ‘선물 공세’를 취하는 등 8세기 초까지 당나라와는 거의 교류를 하지 않으면서도 신라와의 교류에는 적극적이었다. 원효와 같은 신라 승려들이 나중에 본국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해질 수 있는 정치•외교사적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ref> 이후, [[나당전쟁]]으로 인해 신라와 당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고 신라는 당과의 전쟁위험이 존재하는 동안 후방의 위협을 제거할 목적으로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720년까지 교류를 증진하며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성덕왕]] 2년(703년) 204명에 달하는 일본국 사신을 받아들일 정도<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zh:三國史記/卷08|본기 권8 성덕왕]] |인용문= 二年...日本國使至 摠二百四人 (2년(703)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는데, 모두 204명이었다. ) }}</ref> 로 성덕왕 초기에는 우호관계에 있었다. 일본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소 소략해 일본 쪽 자료를 보충하지 않을 수 없지만, 양쪽 자료를 종합해보면 670년부터 779년까지 한 세기 동안 신라 사신들이 일본에 39차례나 파견됐다. 같은 기간에 일본 사신들은 신라를 25차례 방문했다. 그 기간에 당나라로 견당사(遣唐使)를 보낸 것은 불과 10차례였다.<ref>{{뉴스 인용|제목=<nowiki>[박노자의 거꾸로 본 고대사]</nowiki> 통일신라-일본의 친교는 왜 잊혀졌나 |url=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5431.html |출판사=한겨레신문사 |뉴스=한겨레21 |저자=[[박노자]] |날짜=2009-07-24 |확인날짜=2009-07-27}}</ref>
 
삼국 중 백제가 왜와 교류가 가장 깊었기 때문에 왜의 귀족층에는 백제계 도래인의 자손이 많이 있었다. 백제를 일본어로는 "구다라"라고 하는데<ref>{{뉴스 인용|제목=<nowiki> [홍윤기의 역사기행] ①일본 속 백제 발자취’</nowiki> |url=http://www.segye.com/Articles/Issue/Issues/Article.asp?aid=20060725000997&sid=3000144&DataID=200607251404000083 |출판사=세계일보 |저자=홍윤기 교수 |날짜=2006-07-25 |확인날짜=2009-07-08|인용문= 일본에서는 백제를 ‘구다라’로 부르기 때문이다.}}</ref>, 백제가 멸망한 뒤에도 [[부여풍]]의 남동생·선광의 자손은 왜 왕실으로부터 [[구다라노코니키시]]('백제왕')의 성을 받아, 백제의 왕통을 전하게 된다. [[간무 천황]](재위 781년~806년)의 어머니인 [[다카노노 니가사]]는 [[백제 무령왕]](재위 501년~523년)을 조상으로 하는 도래인 야마토씨의 출신이다. 일찍이 한반도 남쪽에서 배를 타고 거센 물결을 헤치며 열도로 건너간 백제인들은 현재의 [[오사카 시오사카시]]에 몰려 살면서 '쿠다라스'(백제주, {{llang|ja|百濟洲}})라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만들기 시작했다.<ref>{{뉴스 인용|제목=<nowiki> [홍윤기의 역사기행] ①일본 속 백제 발자취’</nowiki> |url=http://www.segye.com/Articles/Issue/Issues/Article.asp?aid=20060725000997&sid=3000144&DataID=200607251404000083 |출판사=세계일보 |저자=홍윤기 교수 |날짜=2006-07-25 |확인날짜=2009-07-08|인용문=오사카(大阪)는 일본 제2의 대도시다. 일찍이 한반도 남쪽에서 배를 타고 거센 물결을 헤치며 열도로 건너간 백제인들은 이곳에 몰려 살면서 ‘백제주(百濟洲)’라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본어로는 ‘구다라스(百濟洲·くだらす)’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백제를 ‘구다라’로 부르기 때문이다.}}</ref> 또한 오늘날까지 당시 백제인이 만든 관계용 저수지인 백제지, 백제씨 일족이나 백제 마을 등도 남아 있다.
 
==== 외교 갈등의 악화 (8세기 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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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일본과 외교관계를 다시 재개하라는 압력을 한국에 가하였다. 제3공화국 정부는 실패를 거듭해왔던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한일협정]] 타결에 역점을 두고 [[1961년]] 겨울부터 일본과의 협상을 추진하였다. [[1961년]] [[10월 20일]] 재개된 제6차 회담은 급속히 진전되었다. 이는 미국의 압력과 경제 개발을 하는데 지원자금을 충당하는 의미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사죄가 없이 한일외교를 재개하려는 것에 대개 야당에서는 굴욕외교라 주장하였고, [[장택상]], [[윤보선]], [[허정]], [[박순천]], [[함석헌]] 등 야당 지도자들은 굴욕외교 반대라는 명목으로 시위를 하였다. 1964년 6월에는 한일굴욕외교 반대 명분으로 전국 대학생의 시위가 발생했다. 1964년 6월 초, 한국 정부가 총리 [[김종필]]을 일본에 파견하자 당시 한일협정에 대해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투쟁" 내걸고 시위가 일어나면서 연이어 [[1964년]] [[6월 3일]]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시내 곳곳에서는 학생 시위대와 경찰, 군인 사이에서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이때 정부에선 [[비상계엄령]]을 발표후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언론검열, 집회금지, 영장 없이 체포 구금 등이 이루어졌다. [[6·3 항쟁]]의 주동자로 구속되었던 인물 중에는 [[고려대학교]]의 총학생회장이자 훗날 17대 대통령이 되는 [[이명박]] 등도 있었다.
 
학생시위가 수그러들지 않자 박정희는 1965년 8월 25일 저녁 중앙청 제 1회의실에서 전국 방송을 통해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ref>{{웹 인용 |저자=[[조갑제]] |url=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26848&C_CC=AC |제목=학생들이 정치깡패의 자리에 들어섰다 |날짜 = 2009-03-22 | 출판사 = 조갑제닷컴 |인용문= 1965년 8월 25일 저녁 박정희 대통령은 중앙청 제 1회의실에서 전국 방송망을 통해 특별 담화문을 19분간 읽어 내려갔다.}}</ref> 담화에서 그는 학생들의 국회해산과 조약무효를 주장하는 것과 데모 만능 풍조를 비판하였고, 시위를 독려하며 데모학생을 영웅시하는 교육자 등을 비판하였으며 구 정치인을 학생데모에 의존하여 정부를 전복하려던 반동분자라고 강경한 어조로 비판하였다.<ref>{{웹 인용 |저자=[[조갑제]] |url=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26848&C_CC=AC |제목=학생들이 정치깡패의 자리에 들어섰다 |날짜 = 2009-03-22 | 출판사 = 조갑제닷컴 }}</ref> 이어 [[1965년]] [[8월 26일]] 아침, 경찰력만으로는 치안유지가 불가능하다는 [[서울특별시장|서울시장]] [[윤치영]]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울시 일원에 위수령을 선포하여 학생시위를 진압하였다.<ref>{{웹 인용 |저자=[[조갑제]] |url=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26848&C_CC=AC |제목=학생들이 정치깡패의 자리에 들어섰다 |날짜 = 2009-03-22 | 출판사 = 조갑제닷컴 |인용문= 1965년 8월 26일 아침, 정부는 경찰력만으로는 치안유지가 불가능하다는 윤치영 서울시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울시 일원에 衛戍令(위수령)을 발동했다. }}</ref> [[8월 27일]] 시위 사태에 대한 문책성 인사로 문교부 장관 [[윤천주]]와 [[서울대학교]] 총장 [[신태환]]을 경질하고 후임에 법무부 차관 [[권오병]]과 교수 [[유기천]]을 각각 임명했다.<ref>{{웹 인용 |저자=[[조갑제]] |url=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26848&C_CC=AC |제목=학생들이 정치깡패의 자리에 들어섰다 |날짜 = 2009-03-22 | 출판사 = 조갑제닷컴 |인용문= 박 대통령은 27일에는 시위 사태에 책임을 지워 윤천주 문교부 장관과 申泰煥(신태환) 서울대 총장을 경질하고 후임에 權五柄(권오병) 법무부 차관과 劉基天(유기천) 교수를 임명했다. }}</ref> 한편, 이 사건으로 한일회담을 추진해오던 공화당 의장 [[김종필]]이 사임하였다.
 
; 국교 정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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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 교류 ==
=== 무역 ===
문자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불명확하지만 일본 [[사가현]]이 원산지인 [[흑요석]]이 한반도(부산 동삼동 패총)에서도 발굴되고 있으며, 매우 광범위한 교역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ref name="ReferenceC"/><ref>{{서적 인용 |제목= 새문화유적지도| 저자=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편집부 |연도= 2003 |출판사=한국문화재보호재단 |쪽= 32 |id={{ISBN|89-85764-39-X}} |인용문= 동삼동패총 ... 또한 일본 신석기시대의 도도로끼식 토기와 흑요석 석재 등은 일본지역으로부터 들어오것으로 당시 사람들의 바다를 통한 문화교류를 알 수 있다.}}</ref> 백제는 [[근초고왕]] 시기 때부터 [[섬진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하구에 위치한 [[하동]]을 대왜교역의 거점으로 확보하였다. 백제는 초기에 한성에서 천안을 거쳐 금강상류로 와서 남원에서 섬진강을 타고 하동으로 가는 교역로를 확보하였다. 하동에서 [[쓰시마 섬]]을 축으로 해서 [[이키 섬]], 그리고 [[규슈]]의 [[마쓰우라 시|마쓰우라 반도(松浦半島)]]에 이르는 길과 [[쓰시마 섬]]에서 오키노시마(沖ノ島), [[후쿠오카현]] 북쪽 해안에 이르는 길이 생겨났다.<ref>도민을 위한 백제의 역사와 문화, 2006년,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name="ReferenceE"/ref> 무역에 있어서는 신라와 왜가 긴밀하게 통교하였다.<ref>{{서적 인용 | 저자 = 연민수 |제목= 일본역사 |출판사=보고사 |연도=1998 |쪽=55 |id = {{ISBN|89-86142-81-3}} |인용문 = 대외적으로는 신라·당과의 통교를 긴밀하게 하는 한편, ...}}</ref> 8세기의 통일 신라와 일본의 무역은 일본의 사절단을 통한 공무역과 상인들에 의한 사무역이 이루어졌는데, 사절단의 공무역은 대당무역에 비해 빈번하지 않았다. 사절단 일행은 최대 수백명에 이르렀는데, 그들 중에는 다수의 상인도 포함되어 이들에 의한 사무역이 주로 이루어졌다. 공무역은 주로 사절단이 건너 와서 예물을 바치면 후대해서 보내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사절단이 무례한 행위를 할 경우 접견을 거부하고 돌려 보내기도 하였다. [[쇼소인]]에 남아 있는 보물을 통해, 신라와 [[나라 시대]]의 일본이 활발히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보관된 보물 중에는 신라의 공방에서 만든 생활용품 ·공예품·문방사구 등이 있다. 구체적인 물품의 종류는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라는 문서에 보이고 있는데, 이 문서는 일본에 들어 온 신라물건을 사기 위해 일본의 관인·귀족들이 물품의 종류와 가격을 적어 관청에 올린 문서이다. 여기에 나타난 물건의 종류를 보면 각종 금속공예·기물·모직가죽제품·불교관계의 물건·약물·향료·염료 등 다양하다.<ref>{{서적 인용 | 저자 = 연민수 |제목= 일본역사 |출판사=보고사 |연도=1998 |쪽=61 |id = {{ISBN|89-86142-81-3}} |인용문 = 정창원 … 특히 신라와 일본의 교류가 활발해 신라의 물건이 많이 남아 있다. 신라의 예를 들면 공방에서 만든 생활용품 ·공예품·문방사구 등 다양하다. 구체적인 물품의 종류는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라는 문서에 보이고 있는데, 이 문서는 일본에 들어 온 신라물건을 사기 위해 일본의 관인·귀족들이 물품의 종류와 가격을 적어 관청에 올린 문서이다. 여기에 나타난 물건의 종류를 보면 각종 금속공예·기물·모직가죽제품·불교관계의 물건·약물·향료·염료 등 다양하다. }}</ref>
 
2002년 3월 22일, 서울에서 열린 고이즈미 일본 총리와 김대중 대통령 간의 한일 정상회담에서, 상호 관세를 철폐하는 자유무역협정(FTA)을 줄기로 하는 한일경제동맹의 실현을 위해, 산업계, 관계, 학계의 3자로 구성되는 공동연구회의 설치가 합의되었다. 2005년내에 실질적으로 교섭을 종료한다는 데에 일치하였으나, 그 실현은 이루지 못하고 있다. 한일간의 FTA가 실현된다면 인구 1.7억명, 국내총생산(GDP) 약 5조 달러의 거대시장이 출현하게 된다. 그 배경에는 중국의 아시아 시장지배와 경쟁하기 위하여, 고도의 기술수준을 지닌 경제의 동맹에 의해 비교우위를 점하려는 생각이 있다.<ref>{{서적 인용 |저자= 오코노기 마사오 {{lang|ja|(小此木政夫)}} |제목= 현대용어의 기초지식{{lang|ja|(現代用語の基礎知識)}} |쪽=513 |장={{lang|ja|朝鮮半島}} |출판사=지유고쿠민샤{{lang|ja|(自有国民社)}} |판=| 언어=일본어 | id= {{ISBN|978-4-426-10128-2}}}}</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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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약 2000년 전에|날짜=2012-06-09}} 일본으로 간 고대 한국인(야요이인)들이 일본에 벼농사법을 전수해주었다는 것이 일본인 학자에 의해 일본 각지의 초기 논의 구조 형태와 농기구들, [[토기]], 주거 형태와 부락 등을 통해 고고학적으로 규명되고 있다. 한반도 벼농사의 도래에 관해 [[교토 대학]] 사학과의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수는 토기의 고고학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모름지기 일본의 벼농사 문화는 한반도 남쪽인 한국을 거쳐 직접 전해졌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또한 시마바라 반도의 구레이시바루 유적에서는 벼와 직물이 짓눌린 흔적이 있는 토기가 발견됨으로써 이미 조몬 시대 만기(晩期)에 한국 문화와 접촉이 있었으며, 야요이 문화의 주요 구성 요소 중에 벼와 직물이 조몬 만기의 사회에 전해진 것을 알게 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nowiki>[홍윤기의 역사기행]②구다라스의 백제인 왕과 왕인 박사 </nowiki> |url=http://www.segye.com/Articles/Issue/Issues/Article.asp?aid=20060801000762&sid=3000144&DataID=200608011326000064 |출판사=세계일보 |저자=홍윤기 교수 |날짜=2006-08-01 |확인날짜=2009-07-19|인용문=약2000년 전에 일본으로 간 고대 한국인(야요이인)들은 ‘벼농사법’도 전수했다. 한반도 벼농사의 도래에 관해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토대학 사학과 교수는 고고학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모름지기 일본의 벼농사 문화는 한반도 남쪽인 한국을 거쳐 직접 전해졌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한국 특유의 바둑판형 지석묘가 기타큐슈(北九州)의 조몬(繩文) 시대(BC 3세기 이전) 후기 말경부터 야요이 시대(BC 3∼AD 3세기) 전기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과, 한국의 지석묘에 있는 특유한 마제석기가 기타큐슈의 야요이 시대 전기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는 점 등은 야요이 문화 형성기에 한국과 기타큐슈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 또한 시마바라 반도의 구레이시바루(礫石原) 유적에서는 벼와 직물이 짓눌린 흔적이 있는 토기가 발견됨으로써 이미 조몬 시대 만기에 한국 문화와 접촉이 있었으며, 야요이 문화의 주요 구성 요소 중에 벼와 직물이 조몬 만기의 사회에 전해진 것을 알게 되었다.”(‘체계일본역사’·1967) }}</ref> 일본에 벼농사가 시작된 시기와 관련된 여러 요소를 검토해 보면 그 모든 것이 한반도 남부와 직결된다.<ref>{{뉴스 인용|제목=<nowiki>[홍윤기의 역사기행]<84>고대 논터 발굴된 오사카 ‘나가하라 유적’</nowiki> |url=http://www.segye.com/Articles/Issue/Issues/Article.asp?aid=20090113003568&subctg1=&subctg2=&sid=3000144& |출판사=세계일보 |저자=홍윤기 교수 |날짜=2009-01-13 |확인날짜=2009-07-08|인용문=이 글의 결론 부분에서 니시타니 교수는 “일본에 벼농사가 시작된 시기와 관련된 여러 요소를 검토해보면 그 모든 것이 한반도 남부와 직결된다. ... ”고 했다. }}</ref> 이처럼 벼농사는 한반도를 경유한 것으로 오랫동안 얘기되어 왔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일본에서는 벼 유전자 연구와 각종 유적에서의 출토품, 수경재배 흔적의 증거등으로부터 남쪽의 동남아시아를 경유하여 전래되고, 이후, 일본에서 조선으로 전해진 것이라는 학설이 일본 고고학계에서의 주류가 되었다.<ref name="ReferenceB"/> 따라서 일본의 각종 역사 교과서의 벼농사의 전래 경로도 수정되고 있다.
 
일찍이 [[가락국]]은 [[왜]]에 [[철]]을 공급하였다.<ref>{{서적 인용 |제목name= 유물로 읽는 우리 역사 | 저자= [[이덕일]] |연도= 1999 |출판사=세종서적 |쪽= 18 |id={{ISBN|89-8407-020-3}} |인용문= 서기 3세기 경의 정황을 전해주는 『삼국지』위서 동이전 한(韓)조에는 이런 기록이 나온다. "국(國)에서 철을 생산하는데 한, 예, 왜가 모두 와서 철을 얻어간다. 장사지낼때에는 철을 사용하는데 이는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또 철을 두 군(낙랑군․대방군)에 공급한다.ReferenceD" 여기서 '국(國)'이 어디를 뜻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문맥상 가야가 위치했던 변한일 가능성이 높다. 그 중에서도 김해의 구야국(가락국)이 가장 유력한 후보이다. }}</ref><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지]] | 저자= [[진수 (서진)|진수]] |연도= 3세기 |장= [[:zh:s:三國志/卷30|三國志 卷30 烏丸鮮卑東夷傳]] |인용문= 國出鐵,韓、濊、倭皆從取之。諸巿買皆用鐵,如中國用錢,又以供給二郡。}}</ref>
 
=== 교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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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 ==
=== 이주 ===
기원전 3세기, 한반도의 고구려·백제·신라·가야국으로부터 일본 열도로 사람들의 이동이 시작되었다.<ref name="ReferenceA"/> 역으로, 기원전 20년에 신라에서 활동한 신하 중에는 왜 출신인 자(호공, 瓠公)도 있었다. 고구려 [[장수왕]](재위: 412년 음력 10월~491년 음력 12월)의 군사들이 한성으로 남침해 [[개로왕]]이 살해(475년)<ref>{{서적 인용 |제목name=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ReferenceF"/권25/개로왕|본기 권25 개로왕]] |인용문= 二十一年...王出逃 麗將桀婁等見王 下馬拜已 向王面三唾之 乃數其罪 縛送於阿且城下戕之(21년(475년)... 왕이 [성을] 나가 도망가자 고구려의 장수 걸루(桀婁) 등은 왕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에 왕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꾸짖었다. [그리고는] 왕을 포박하여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ref> 되고, 왕자인 [[문주왕]](재위 475년~477년)은 위기에 빠진 백제를 구하기 위한 숱한 고민 끝에, 목만치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여기서 "남쪽"이 일본을 뜻한다고 하는 견해들이 있다.<ref>{{서적 인용 |제목name=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ReferenceG"/권25/개로왕|본기 권25 개로왕]] |인용문= 二十一年... 文周乃與木劦滿致·祖彌桀取 木劦·祖彌皆複姓 隋書以木劦爲二姓 未知孰是 南行焉 (21년(475년) 문주는 이에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 <목협(木劦)과 조미(祖彌)는 모두 복성(復姓)이었다. 수서(隋書)에는 목협을 두개의 성(姓)으로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ref><ref>{{서적 인용 |저자name=정윤미 |제목=일본에 고함(KBS 국권 침탈 100년 특별기획) |연도= 2011 |출판사=시루 |위치=|id={{ISBN|978-89-966493-2-8}} |쪽= 31 |인용문 = 비상시국에 군주의 자리에 오른 문주왕은 자신이 신뢰하는 한 신하에게 특명을 내린다. 위기에 빠진 백제를 구하기 위한 숱한 고민 끝에 나온 복안이었다. 그 신하의 이름이 바로 목협만치(木劦滿致)였다. ...말 그대로 문주왕은 목협만치를 남쪽으로 보냈고 그가 향한 남쪽은 바다 건너 섬나라, 즉 일본을 뜻했다.}}<"ReferenceH"/ref><ref>{{서적 인용 |저자name=KBS역사스페셜 |제목=역사스페셜3 |연도= 2001 |출판사=효형출판 |위치=|id={{ISBN|89-86361-55-8}} |쪽= 84 |인용문 = 소가노의 증조부는 백제에서 건너왔는데 한국에서는 목협만치(木劦滿致, ‘목례만치’라고도 함), 일본에서는 소가노 만치라고 한다. 『삼국사기』엔 개로왕(蓋鹵王) 21년 (475) 백제가 고구려의 침략을 받은 위급한 상황에서 이 목협만치가 개로왕의 아들 문주와 함께 웅진으로 천도한 것으로 나온다. }}<"ReferenceI"/ref>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목만치는 일본에 건너가 성(姓)을 바꾸어 [[소가노 마치]]라는 이름의 귀족이 된다.
 
=== 학술과 교육 ===
무령왕은 [[513년]]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ref>{{서적 인용 |제목name=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ReferenceJ"/卷第十七|卷第十七 繼體天皇]]> |인용문=七年夏六月 ... 貢五經博士段楊爾。}}</ref>와 [[516년]] [[고안무]](高安茂)<ref>{{서적 인용 |제목name=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ReferenceK"/卷第十七|卷第十七 繼體天皇]]> |인용문=十年夏五月 ... 別貢五經博士漢高安茂、}}</ref>를 일본에 보내어 [[백제]]의 문화를 일본에 전해주기도 하였다. 577년(위덕왕 24년, 비다쓰 천황 6년)에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대대적으로 학자들이 건너갔다.<ref>{{서적 인용 |제목name=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ReferenceR"/卷第二十|卷第二十 敏達天皇]] |인용문=六年...冬十一月庚午朔、百濟國王、付還使大別王等、獻經論若干卷、幷律師・禪師・比丘尼・呪禁師・造佛工・造寺工、六人。遂安置於難波大別王寺。 }}</ref><ref>{{서적 인용 |저자name= 최용범 |기타= |제목=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날짜=2008 |출판사=페이퍼로드 |id={{ISBN|978-89-92920-16-2}}|쪽= 48 |인용문=백제는 그 뒤 577년(위덕왕 24년)에 불상 만드는 기술자, 절 건축자를 보냈고, 이어 금속공예사, 기와 굽는 기술자까지 보냈다. }}<"ReferenceT"/ref>
 
===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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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
=== 종교 ===
성왕 때, 백제는 일본에 불교를 전파했다(538년).<ref>{{서적 인용 |저자name= 이은직 |기타= 정홍준 역 |제목= 조선명인전 |연도= 2005 |출판사= 일빛|id={{ISBN|89-5645-088-9}}|쪽= 28 |인용문= 백제는... 538년에는 불교를 전파했다.}}<"ReferenceL"/ref> 성왕은 [[긴메이 천황]](재위 539년 ~ 571년)에게 사신과 함께 불상 및 불경을 보냈다. 이때 백제에서 건너온 물품 속에는 불교의 교리는 탁월하나 난해하고, 그것을 믿으면 무한한 복이 있을 것이라는 편지도 있었다.<ref>{{서적 인용 |제목name= 세계 종교사 입문 | 저자=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도= 2003 |출판사=청년사 |쪽= 229 |id={{ISBN|89-7278-376-5}} |인용문= 일본에 불교가 도입된 것은 538년 C.E(일설에는 552년 C.E.)이다. 당시의 일본 왕 긴메이(欽明) 천황이 백제의 성왕(聖王 또는 聖明王)이 사신과 함께 보내온 불상 및 불경을 받은 것이 그 시초였다. 이때 백제에서 건너온 물품 속에는 불교의 교리는 탁월하나 난해하고, 그것을 믿으면 무한한 복이 있을 것이라는 편지도 있었다고 한다.}}<"ReferenceM"/ref> 불교의 수용을 둘러싸고 왜국 조정은 큰 소용돌이에 빠졌다. 긴메이 천황과 [[소가노 마치]]의 후손이자 호족인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는 불교를 수용하려 했으나 또다른 호족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와 나카토미노 가마소(中臣鎌子)가 이에 반대하였으므로, 긴메이 천황은 둘 사이에서 시달리게 되었다.<ref>{{서적 인용 |저자name=[[이덕일]] |제목=우리 역사의 수수께끼3 |연도= 2004 |출판사=김영사 |위치=|id={{ISBN|89-349-1654-0}} |쪽= 74 |인용문 = 백제에서 전해 준 불교는 그 수용을 둘러싸고 왜국 조정에 큰 소용돌이를 몰고 온다. 긴메이천황과 호족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는 수용하려 했으나 또다른 호족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와 나카토미노 가마소(中臣鎌子)가 반대했다. }}<"ReferenceN"/ref><ref>{{서적 인용 |저자=[[홍윤기 (1957년)|홍윤기]] |제목=일본 천황은 한국인이다 |연도= 2000 |출판사=효형출판 |위치=|id={{ISBN|89-86361-32-9}} |쪽= 92 |인용문 = 그 당시(538년) 최고대신 소가노 이나메(소가노 우마코 대신의 아버지)는 성왕이 보내준 금동석가상을 자신의 저택에 모셔다 놓고, 자택을 코우겐지〔向原寺〕로 삼았다. 이 무렵 국신파였던 모노노베노 오코시 〔物部尾輿, 모노노베노 모리야의 아버지〕대련(大連)이 조정에서 불교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백제인 킨메이 천황은 본국에서 성왕이 불교 신앙을 권유했기 때문에 몹시 곤혹스러워졌다. 즉 불교 신앙에 열성적인 최고대신 소가노 이나메와 국신파인 제2위의 장관 모노노베노 오코시의 양 파 사이에 끼여 적잖게 시달리게 되었다.}}</ref>
 
그리고, 백제는 석가불금동상 1구, 번개(幡蓋) 약간, 경론(經論) 약간권을 딸려서 달솔 [[노리사치계]](怒唎思致契) 등을 일본에 파견(552년)하였다.<ref>{{서적 인용 |제목name=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ReferenceO"/卷第十九|卷第十九 欽明天皇]] |인용문=十三年...冬十月、百濟聖明王、更名聖王。遣西部姬氏達率怒唎斯致契等、獻釋迦佛金銅像一軀・幡蓋若干・經論若干卷。 (13년(552년) 겨울 10월, 백제의 성명왕(혹은 성왕이라고도 한다)이, 서부달솔 희씨 노리사치계를 보내어 석가불금동상 1구와 깃발 약간, 경전 여러 권을 보냈다. }}</ref> 이 번개는 그 장엄함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일본서기]]》에 기록될 정도이므로 보통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ref>{{서적 인용 | 저자 name= 고유섭 |제목= 구수한 큰맛 |출판사=다할미디어 |연도=2005 |쪽=160 |id = {{ISBN|89-89988-24-1}} |인용문 = 원래 백제의 공예는 고도로 발달되었나니, 성왕 3년에 일본에 전한 번개(幡蓋)는 그 장엄함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일본 정사에 특히 그 기록이 실려 있는 것만 보더라도 보통이 아니었음을 알겠고, ...}}<"ReferenceP"/ref> 552년에는 사원 건설을 위해 백제의 많은 학자와 기술자들이 일본에 파견되었다.<ref>{{서적 인용 |저자name= 이은직 |기타= 정홍준 역 |제목= 조선명인전 |연도= 2005 |출판사= 일빛|id={{ISBN|89-5645-088-9}}|쪽= 28 |인용문= 552년에는 사원 건설을 위해, 많은 학자와 기술자를 비롯하여 의사나 음악가까지 파견하였다. }}<"ReferenceQ"/ref> 577년(위덕왕 24년, 비다쓰 천황 6년)에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경론 몇 권, 대대적인 학자와 율사{{.cw}}선사{{.cw}}비구니{{.cw}}주금사 등 승려 집단, 불상 만드는 기술자, 사찰을 지을 목수들이 파견되었다.<ref>{{서적 인용 |제목name=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ReferenceR"/卷第二十|卷第二十 敏達天皇]] |인용문=六年...冬十一月庚午朔、百濟國王、付還使大別王等、獻經論若干卷、幷律師・禪師・比丘尼・呪禁師・造佛工・造寺工、六人。遂安置於難波大別王寺。 }}</ref>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절과 부처 등을 만들었다.<ref>{{서적 인용 |제목name= 야사로 보는 삼국의 역사1 | 저자= 최범서|연도= 2006 |출판사=가람기획 |쪽=166 |id={{ISBN|89-8435-241-1}} |인용문= 그 후 위덕왕 24년에 백제왕이 경론 몇 권, 율사律師 · 선사禪師 · 비구니 · 주금사呪噤師 · 조불공造佛工 · 조사공造寺工 등 6명을 보내었다.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절과 부처 등을 만들었다. }}<"ReferenceS"/ref> 그 뒤, 금속공예사, 기와 굽는 기술자들까지 건너갔다.<ref>{{서적 인용 |저자name= 최용범 |기타= |제목=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날짜=2008 |출판사=페이퍼로드 |id={{ISBN|978-89-92920-16-2}}|쪽= 48 |인용문=백제는 그 뒤 577년(위덕왕 24년)에 불상 만드는 기술자, 절 건축자를 보냈고, 이어 금속공예사, 기와 굽는 기술자까지 보냈다. }}<"ReferenceT"/ref> 신라에서도 579년에 승려와 불상을 보냈다.<ref>{{서적 인용 |저자name= 이은직 |기타= 정홍준 역 |제목= 조선명인전 |연도= 2005 |출판사= 일빛|id={{ISBN|89-5645-088-9}}|쪽= 28 |인용문= 백제는... 이어서 577년에는 대대적인 학자와 승려 집단, 불상 및 사찰을 지을 목수들이 건너갔고, 신라에서도 579년에 승려와 불상을 보냈다. }}<"ReferenceU"/ref> 583년에는 [[비다쓰 천황]]의 요청으로 고승 [[일라]](日羅)가 건너갔다.<ref>{{서적 인용 |제목name=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ReferenceV"/卷第二十|卷第二十 敏達天皇]] |인용문=十二年... 今在百濟火葦北國造阿利斯登子達率日羅、賢而有勇。... 冬十月、紀國造押勝等、還自百濟。復命於朝曰、百濟國主、奉惜日羅、不肯聽上。 }}</ref><ref>{{서적 인용 |제목name= 한국인의 윤리사상사 | 저자= 이기영 |연도= 2000 |출판사=학문사 |쪽=132 |id={{ISBN|89-467-1092-6}} |인용문= 위덕왕... 30년(583)에는 일본왕의 요청으로 고승 일라(日羅)가 건너갔으며, ... }}<"ReferenceW"/ref> 584년 백제는 다시 왜국에 불상 1구와 미륵상 1구를 보냈다.<ref>{{서적 인용 |제목name=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ReferenceX"/卷第二十|卷第二十 敏達天皇]] |인용문=十三年... 秋九月、從百濟來鹿深臣、闕名字。有彌勒石像一軀。佐伯連、闕名字。有佛像一軀。 }}</ref> 이때 대신으로 있던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551년?~626년)는 소가노 이나메의 아들이었는데, 우마코도 부친 소가노 이나메의 불교 수용에 대한 유언에 따라 이 불상을 받아들이려 했다.<ref>{{서적 인용 |저자name=[[이덕일]] |제목=우리 역사의 수수께끼3 |연도= 2004 |출판사=김영사 |위치=|id={{ISBN|89-349-1654-0}} |쪽= 76 |인용문 = 약 30년 후인 비다쓰(敏達)천황 13년(584)에 백제의 위덕왕(威德王)은 다시 왜국에 불상 1구와 미륵상 1구를 보냈다. 이때 대신으로 있던 소가노 이나메의 아들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도 부친처럼 이 불상을 받아들이려 했다. 소가노 우마코는 아버지로부터 불교를 수용하라는 유언을 받은 터였다.}}<"ReferenceY"/ref> 588년(위덕왕 35년)에 백제는 불사리(佛舍利)와 승려 여섯 명, 노반박사(鑪盤博士)로서 [[장덕 (관직)|장덕]](將德) 백매순(白昧淳), 와박사(瓦博士)로서 마나문노(麻奈文奴){{.cw}}양귀문(陽貴文){{.cw}}석마제미(昔麻帝彌) 등 네 명, 화공(畵工) 한 명 등 사찰 건설에 필요한 기술자를 일본에 파견하여 백제의 공예미술이 일본에 널리 전파되었다.<ref>{{서적 인용 |제목name=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ReferenceZ"/卷第廿一|卷第廿一 用明天皇 崇峻天皇]] |인용문=崇峻天皇 ... 元年春三月、... 百濟國遣恩率首信・德率蓋文・那率福富味身等、進調幷獻佛舍利、僧聆照律師・令威・惠衆・惠宿・道嚴・令開等、寺工太良未太・文賈古子・鑪盤博士將德白昧淳、瓦博士麻奈文奴・陽貴文・㥄貴文・昔麻帝彌、畫工白加。 }}</ref><ref>{{서적 인용 | 저자 = 고유섭 |제목= 구수한 큰맛 |출판사=다할미디어 |연도=2005 |쪽=160 |id = {{ISBN|89-89988-24-1}} |인용문 = 원래 백제의 공예는 고도로 발달되었나니, ... 위덕왕 35년에 노반박사(露盤博士)로서 장덕(將德){{.cw}}백미순(將德白味淳)의 도일, 와박사(瓦博士)로서 마나부노(麻奈父奴){{.cw}}양귀문(陽貴文){{.cw}}석마제미(昔麻帝彌)의 도일 등 백제의 공예미술이 널리 전파된 것을 알겠다.}}</ref><ref>{{서적 인용 |제목= 고대로부터의 통신 | 저자=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 분과 |연도= 2004 |출판사=푸른역사 |쪽=285 |id={{ISBN|89-87787-79-6}} |인용문= 《일본서기》에 따르면, 민달천황 敏達天皇 원년(588)에 백제가 불사리佛舍利와 승려 여섯 명, 노반박사 露盤博士 한 명, 와박사 네 명, 화공畵工 한 명 등 사원 건설에 필요한 기술자를 일본에 파견하였다고 한다. }}</ref>
 
602년 [[관륵]](觀勒)이 일본에 건너가 [[천문]]·[[책력]]·[[지리]]·둔갑방술(遁甲方術) 등에 관한 많은 책을 전하고, 불교를 전파하였다.<ref>{{서적 인용 |제목=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卷第廿二|卷第廿二 推古天皇]] |인용문=十年... 冬十月、百濟僧觀勒來之。仍貢暦本及天文地理書、幷遁甲方術之書也。是時、選書生三四人、以俾學習於觀勒矣。 }}</ref> [[소가노 우마코]]는 불교 수용에 적극적인 성향을 보여, 마찬가지로 불교 수용에 관심을 보이던 [[쇼토쿠 태자]]와 연대하여, 불교 수용에 반대하는 배불파(排佛派)이자 국신파(國神派)인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와 정쟁을 되풀이한 끝에 승리를 거두어 오무라지(大連)인 모노노베 씨를 타도하고 중앙 권력의 정점에 섰다. 모노노베 씨는 [[백제]]에서 불교까지 들어온다면 자기네의 선주(先住) 신앙과 조정에서의 세력이 더욱 약화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ref>{{서적 인용 |저자=[[홍윤기 (1957년)|홍윤기]] |제목=일본 천황은 한국인이다 |연도= 2000 |출판사=효형출판 |위치=|id={{ISBN|89-86361-32-9}} |쪽= 87 |인용문 =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오랜 세월 인내와 투쟁 속에서 배불파(排佛派)의 우두머리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 515~587〕일당을 섬멸시킨 것이다. 조정의 제2위의 장관이던 모노노베노 모리야는 이른바 국신파(國神派)였다. 그러므로 백제에서 불교까지 들어온다면 자기네의 선주(先住) 신앙과 조정에서의 세력이 더욱 약화될 것을 우려해서 불교를 신봉하는 소가노 우마코에게 대립한 것이다. }}</ref>
 
=== 음악 ===
552년에 백제에서 일본으로 음악가가 파견된 바 있다.<ref>{{서적 인용 |저자name= 이은직 |기타= 정홍준 역 |제목= 조선명인전 |연도= 2005 |출판사= 일빛|id={{ISBN|89-5645-088-9}}|쪽= 28 |인용문= 552년에는 사원 건설을 위해, 많은 학자와 기술자를 비롯하여 의사나 음악가까지 파견하였다. }}<"ReferenceQ"/ref>
 
=== 미술 ===
현존하는 [[스다하치만 신사 인물화상경|인물화상경]](5~6세기)은 백제 [[무령왕]](재위 501년~523년)이 [[게이타이 천황]](재위 507년 ~ 531년)에게 선물로 보낸 거울인데, 이것은 백제와 [[왜]]의 친밀한 사이를 증명한다. 577년(위덕왕 24년, 비다쓰 천황 6년)에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금속공예사, 기와 굽는 기술자들까지 건너갔다.<ref>{{서적 인용 |제목name=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ReferenceR"/卷第二十|卷第二十 敏達天皇]] |인용문=六年...冬十一月庚午朔、百濟國王、付還使大別王等、獻經論若干卷、幷律師・禪師・比丘尼・呪禁師・造佛工・造寺工、六人。遂安置於難波大別王寺。 }}</ref><ref>{{서적 인용 |저자name= 최용범 |기타= |제목=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날짜=2008 |출판사=페이퍼로드 |id={{ISBN|978-89-92920-16-2}}|쪽= 48 |인용문=백제는 그 뒤 577년(위덕왕 24년)에 불상 만드는 기술자, 절 건축자를 보냈고, 이어 금속공예사, 기와 굽는 기술자까지 보냈다. }}<"ReferenceT"/ref> 신라에서도 579년에 불상을 보냈다.<ref>{{서적 인용 |저자name= 이은직 |기타= 정홍준 역 |제목= 조선명인전 |연도= 2005 |출판사= 일빛|id={{ISBN|89-5645-088-9}}|쪽= 28 |인용문= 백제는... 이어서 577년에는 대대적인 학자와 승려 집단, 불상 및 사찰을 지을 목수들이 건너갔고, 신라에서도 579년에 승려와 불상을 보냈다. }}<"ReferenceU"/ref> 588년(위덕왕 35년)에 백제는 불사리(佛舍利)와 승려 여섯 명, 노반박사(鑪盤博士)로서 [[장덕 (관직)|장덕]](將德) 백매순(白昧淳), 와박사(瓦博士)로서 마나문노(麻奈文奴)·양귀문(陽貴文)·석마제미(昔麻帝彌) 등 네 명, 화공(畵工) 한 명 등 사찰 건설에 필요한 기술자를 일본에 파견하여 백제의 공예미술이 일본에 널리 전파되었다.<ref>{{서적 인용 |제목name=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ReferenceZ"/卷第廿一|卷第廿一 用明天皇 崇峻天皇]] |인용문=崇峻天皇 ... 元年春三月、... 百濟國遣恩率首信・德率蓋文・那率福富味身等、進調幷獻佛舍利、僧聆照律師・令威・惠衆・惠宿・道嚴・令開等、寺工太良未太・文賈古子・鑪盤博士將德白昧淳、瓦博士麻奈文奴・陽貴文・㥄貴文・昔麻帝彌、畫工白加。 }}</ref><ref>{{서적 인용 | 저자 = 고유섭 |제목= 구수한 큰맛 |출판사=다할미디어 |연도=2005 |쪽=160 |id = {{ISBN|89-89988-24-1}} |인용문 = 원래 백제의 공예는 고도로 발달되었나니, ... 위덕왕 35년에 노반박사(露盤博士)로서 장덕(將德){{.cw}}백미순(將德白味淳)의 도일, 와박사(瓦博士)로서 마나부노(麻奈父奴){{.cw}}양귀문(陽貴文){{.cw}}석마제미(昔麻帝彌)의 도일 등 백제의 공예미술이 널리 전파된 것을 알겠다.}}</ref><ref>{{서적 인용 |제목= 고대로부터의 통신 | 저자=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 분과 |연도= 2004 |출판사=푸른역사 |쪽=285 |id={{ISBN|89-87787-79-6}} |인용문= 《일본서기》에 따르면, 민달천황 敏達天皇 원년(588)에 백제가 불사리佛舍利와 승려 여섯 명, 노반박사 露盤博士 한 명, 와박사 네 명, 화공畵工 한 명 등 사원 건설에 필요한 기술자를 일본에 파견하였다고 한다. }}</ref>
 
== 과학 ==
552년에 백제의 의사가 일본에 파견된 바 있다.<ref>{{서적 인용 |저자name= 이은직 |기타= 정홍준 역 |제목= 조선명인전 |연도= 2005 |출판사= 일빛|id={{ISBN|89-5645-088-9}}|쪽= 28 |인용문= 552년에는 사원 건설을 위해, 많은 학자와 기술자를 비롯하여 의사나 음악가까지 파견하였다. }}<"ReferenceQ"/ref> 성왕은 또한 의박사·역박사 등의 전문가와 기술자를 교대로 파견하여 일본에 선진문물을 전파하는 데 기여하였다.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