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웹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웹
1번째 줄:
야 이거 고치지 마라
 
젖까
== 인생 ==
=== 어린 시절 (1853~1869) ===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의 [[쥔더르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종교적 활동과 미술을 추구했다. 반 고흐는 진지하고 내성적이었으며, 어린아이답지 않게 생각이 깊었다. 고흐가 태어나기 정확히 1년 전인 1852년 3월 30일 고흐의 형이 태어났으나, 얼마 못 가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흐가 집안의 장남이었다. 1860년에 그는 200명 정도의 아이들이 다니고 있던 [[로마 가톨릭교회]] 성격의 쥔더르트 마을 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부모의 권유로 입학했던 기숙사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서 [[1861년]]부터 새로운 학교에 입학하기까지 3년 동안 그의 여동생 안나와 함께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1864년에는 32km 떨어진 학교에 다녔는데 그는 가족을 집에 놔두고 떨어져 있는 것을 싫어했고, 어른이 되어서도 그것을 회상하곤 했다. 1866년 9월 15일부터 1868년 3월까지 그는 [[틸뷔르흐]]에 위치한 제2 빌렘 칼리지에 다녔다. 고흐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우울하고 차가웠던 불모스러운”시간이라고 했다.<ref>[http://webexhibits.org/vangogh/letter/14/347.htm 빈센트 반 고흐가 테오 반 고흐에게 보낸 편지 - Nuenen, c. 1883년 12월 18일]</ref>
 
=== 청년 시절 (1869~1878) ===
[[파일:VincentVanGoghFoto.jpg|섬네일|오른쪽|[[1876년]]의 반 고흐]]
16살에 빈센트는 삼촌 빈센트의 권유로 [[헤이그]]에 있는 구필 화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의 네 살 아래 동생이자 빈센트가 평생의 우애로 아꼈던 그의 동생 [[테오 반 고흐 (미술상)|테오]]도 나중에 그 회사에 들어왔다. 이 우애는 그들이 서로 주고받았던 엄청난 편지 모음에 충분히 기록되어 있다. 이 편지들은 보존되어 오다가 [[1914년]]에 출판되었다. 그 편지들은 그 화가의 삶에 많은 통찰을 주었고, 그가 예민한 마음의 재능 있는 작가라는 것도 보여 주었으며, 무명화가로서의 고단한 삶에 대한 슬픔이 묘사되어 있다. 테오는 빈센트의 삶을 통틀어서 경제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1873년]]에 그의 회사는 그를 [[런던]]으로, 다음에는 [[파리 시|파리]]로 발령했다. 그는 점점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876년]]에 구필은 동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를 해고했는데, 이는 고흐가 가게에서 영업활동을 할 때, 손님들과 그림에 대한 관점 차이로 언쟁을 자주 벌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잉글랜드]] [[켄트주]]의 [[감리교]]학교 [[램스게이트]]에서 견습교사가 된 다음 [[1877년]]에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왔다.
 
=== 보리나주 ===
[[1878년]]에 신학교를 그만둔 그는 [[보리나주]]로 알려진 [[벨기에]]의 가난한 광산촌에서 평신도 설교자가 되었다. [[광산]]에서 설교활동을 하던 고흐는 고용주들의 착취를 받으며 고된 노동을 하는 대다수 노동자들을 매우 걱정했다. 결국 그는 6개월 후에 해고되었고 보수 없이 일을 계속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목탄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1880년]]에, 빈센트는 동생 테오의 제안을 따라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짧은 기간 동안 빈센트는 [[헤이그]]에서 [[안톤 모브]](Anton Mauve)<ref>네덜란드인이지만 성은 프랑스어식으로 발음</ref>로부터 그림 수업을 받았다. 비록 빈센트와 안톤은 곧 예술적인 관점의 차이로 헤어졌지만, 헤이그 미술 학교의 영향은 그가 빛을 다루는 방식과 그의 붓 자국의 산만함에서 빈센트의 작품에 눈에 띄게 남아 있다. 그러나 어두운 색조를 선호하는 그의 색채 사용에서는 그의 스승과 차이를 두었다.
 
=== 1881년 이후 ===
[[1881년]]에 그는 과부인 사촌 케이 보스에게 그의 사랑을 고백했지만 그녀는 그를 거부했다. 나중에 그는 매춘부 신 호르닉과 그녀의 아이들과 함께 이사하고 그녀와 결혼할 것을 생각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 관계에 엄격하게 반대했고 심지어 그의 동생 테오도 그것에 반대하는 조언을 했다. 무엇보다도 신 호르닉과 고흐는 성격차이가 있었고 결국 그들은 나중에 헤어졌다.
 
[[1885년]]과 [[1886년]] 사이의 겨울에 반 고흐는 [[벨기에]]에 있는 [[안트베르펀]]의 미술 학교에 등록했다. 이 일은 실망만 안겨주었는데, 그가 몇 달 후에 외젠 시베르트 교수에 의해 퇴학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반 고흐는 그 기간 동안 [[일본화]]를 접하고 관련 작품을 열렬히 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일본화의 밝은 색채와 캔버스 공간의 사용, 그림에서 보인 선의 역할에 감탄했으며, 이러한 인상은 그에게 강하게 영향을 주어 일본풍으로 약간의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또한 그가 그린 몇몇의 초상화도 일본화를 보여주는 배경을 설정해 놓고 그렸다. 고흐는 [[정신장애]]로 인한 고통을 소용돌이와 원색의 노란색으로 표현하여 〈프로방스 시골길의 하늘 풍경〉, 〈[[별이 빛나는 밤]]〉,〈[[해바라기 (고흐)|해바라기]]〉 등의 걸작들을 그렸다.<ref>{{웹 인용 |url=http://news.kbs.co.kr/article/culture/200804/20080403/1537175.html |제목=정신병이 낳은 불후의 명작들-KBS뉴스 2008년 4월 3일 보도, 이해연 기자 |확인날짜=2008-04-03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80404131444/http://news.kbs.co.kr/article/culture/200804/20080403/1537175.html |보존날짜=2008-04-04 |url-status=dead }}</ref>즉, 고흐의 그림 속에는 [[정신]]적인 고통과 이를 극복하고자 한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1888년]] 12월 23일에 그는 아를의 사창가에 있는 매춘부에게 자신의 왼쪽 귀 조각을 건넸다. 고흐는 매춘부의 신고를 받고 그의 집에 도착한 경찰에 의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아를의 주민들은 그를 ‘미친 네덜란드 사내’라고 하며 그에게 마을을 떠나라고 강요했다. 그리고 그는 [[1889년]] 5월 8일, 생레미의 한 정신병원에 들어갔다.
 
=== 사망 ===
1890년 7월 27일, 고흐는 들판으로 걸어나간 뒤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쏘았다. 그는 바로 죽지는 않았지만 그 총상은 치명적이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간 후, 심하게 앓고 난 이틀 뒤, 동생 테오가 바라보는 앞에서 37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그리고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동생 테오도 [[매독]]을 앓다가 죽었다. 두 형제의 시신은 나란히 묻혔다.
 
== 작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