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푸시킨: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Zorrobot (토론 | 기여)
잔글 로봇이 더함: arz:بوشكين
편집 요약 없음
1번째 줄:
[[그림:AleksandrPushkin.jpg|thumb|250px|알렉산드르 푸시킨]]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llang|ru|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Пушкин}}, {{llang|ko-KP|알렉싼드르 뿌슈낀}}, [[1799년]] [[6월 6일]]~[[1837년]] [[2월 10일]])은 [[러시아]]의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외조부는 [[표트르 대제]]를 섬긴 아비시니아 흑인 귀족이었다.
 
그가 어렸을 때 유모 아리나가 들려준 러시아의 옛날 이야기 및 설화가 그를 대시인으로 성공시키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가정교사로부터 배운 외국어 가운데 프랑스어에 가장 뛰어나 10세경에 이미 프랑스어로 시를 썼다. 1811년(12세), [[차루스코에 세로]]에 있던 학습원에 들어가서 자유주의적 교육의 영향을 받았다. 1816년(17세)의 공개 진급시험에서는 자작시 <차루스코에 세로의 추억>을 낭독하여 이곳에 나와 있던 노시인 [[가브릴라 데르자빈|가브릴라 데르자빈]]을 감격시켰다고 한다. 1817년(18세), 학습원을 졸업하고 외무성에 들어간다. 그 후 거의 3년간은 고등 룸펜이 되어 사교계에 출입하면서 방탕한 생활을 보냈으나 명석한 판단력은 잃지 않고 자유주의적 정신으로 농노 제도 및 전제정치를 공격하는 시 《자유》(1817), 《마을》(1819) 등을 발표했는데, 이 때문에 1820년 남러시아로 추방당하기에 이르렀다. 그해 설화를 주제로 하면서 구어를 대담하게 채용한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발표하여서 러시아 시에 새 경지를 개척하는 동시에 시인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 생애 ==
 
추방생활 중 [[조지 고든 바이런|바이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카프카스의 포로》(1822), 《집시》(1823), 《바흐치사라이의 샘》(1824) 등 낭만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서사시 및 서정시를 썼으며, 이 동안에 [[콘드라티 표도로비치 릴레예프|릴레예프]] 등 [[데카브리스트]]와 친해졌다. 1824년 오데사 총독과 충돌, 프스코프 현에 있는 모친 영지 미하일로프스코 촌에 칩거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점차로 바이런의 영향에서 벗어나 이미 남방체제 중에 제1장을 발표한 바 있는 시형식 소설 《[[예프게니 오네긴]]》의 후속 장이나 《보리스 고두노프》에는 리얼리즘에의 이행이 엿보인다. 1825년의 데카브리스트 반란 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거주는 허용되었으나 위험인물로 취급되어 황제의 직접 검열을 받아야 하는 중압하에 우울한 기분을 나타내는 서정시나 연애생활을 하면서 기분전환을 꾀하다가, 1830년부터 새로운 창작생활 시기에 들어간다.
유년시대는 백부 [[바실리]]와 친지인 [[카람진 제콥스키]] 등 러시아 낭만주의 시인들의 영향을 받았다. [[1811년]] ∼ [[181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의 [[차르스코예셀로]]의 전문학교에 다녔다. [[1820년]] 농촌이라는 시가 널리 읽혀지자, 당시 "정부는 그것이 정부에 대항한다"는 명목으로 푸시킨을 남부 러시아로 유배시키고, 푸슈킨은 [[키시너우|키시뇨프]], [[오데사]]에서 살았다.
 
[[그림:Ivan Makarov - Natalia Nikolaevna Pushkina-Lanskaya 1849.jpg|thumb|150px|푸시킨의 아내 나탈리아 곤차로바]]
키시너우나 오데사에 살던 시절, [[데카브리스트]]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의 사상과 영향을 받았다. [[1824년]]엔 국외망명에 실패하면서, [[미하일롭스코예]]란 곳에서 유배되었다.
그는 우선 《오네긴》을 완성하고 이어 《인색한 기사》(1833) 등 시작품을 내는 한편, 신문에도 손을 대 단편집 《벨킨 이야기》(1830), 《스페이드 여왕》(1834), 소설 《[[대위의 딸]]》 등 허다한 걸작을 썼다. 이러는 동안 1831년 미모로 소문난 나탈리야 곤차로바와 결혼했으나 그의 반역정신을 적대시하는 귀족들이 나탈리야가 부정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날조된 소문을 퍼뜨림으로써 푸시킨은 부득이 결투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비운의 죽음을 당했다.
 
그는 러시아 근대문학의 창시자로서 문학의 온갖 장르에 걸쳐 그 재능을 발휘했다. 과거 100년간 러시아 시분야에서 그의 간결하고 평이 명료한 시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지 않은 시인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산문에 있어서도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의 기초는 그에 의해 구축되었다.
[[1837년]] [[1월 27일]] 아내 나탈랴를 짝사랑하는 프랑스 망명귀족 단테스와의 결투로 부상하여, 2일 후에는 38세의 나이에 죽었다.
 
== 작품 ==
줄 29 ⟶ 32:
* 《[[대위의 딸]]》(1836년)
 
[[분류{{기본정렬:1799년 태어남|푸시킨, 알렉산드르]]}}
[[분류:1837년1799년 죽음|푸시킨, 알렉산드르태어남]]
[[분류:러시아의1837년 시인|푸시킨, 알렉산드르죽음]]
[[분류:러시아의 소설가|푸시킨, 알렉산드르시인]]
[[분류:러시아의 소설가]]
[[분류:아프리카계 러시아인|푸시킨, 알렉산드르]]
 
[[af:Aleksander Poesjk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