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준: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211.253.60.65(토론)의 29540274판 편집을 되돌림
8명의 첩을 거느림
태그: 되돌려진 기여
1번째 줄:
{{다른 사람|송병준 (방송인)||대한민국의 방송인, 대중음악 작곡가}}
{{공직자범죄자 정보
|이름 = 송병준
|원래 이름 = 宋秉畯
27번째 줄:
'''송병준'''(宋秉畯, [[1857년]] [[음력 8월 20일]] ~ [[1925년]] [[2월 1일]])은 [[조선|조선 시대 말기]]에 활동한 무관이다. 조선국 사헌부 감찰 등을 지냈다.
 
[[정미칠적]] 중 일원이며 [[한일 합병 조약]] 체결 과정에서도 [[일진회]]를 통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무과]] 급제 후 무관으로 활동하다가 [[김옥균]]을 암살 밀명을 받고 [[일본]]에 건너갔지만 오히려 김옥균에게[[김옥균]]에게 감화되었고 그의 동지가 되면서 [[개화파]] 정치인이 되었다.<ref name="sik132">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 2》 (인물과 사상사, 2007) 132페이지</ref> 그러나 뒤에 [[친일파]]로 변절하여 [[일진회]] 등의 조직과 [[한일신협약]] 체결, [[한일 합방]]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오늘날 그는 [[이완용]]과 함께 [[친일파]], [[매국노]]의 수괴로 대표되는 인물이 되었다.
 
본관은 [[은진 송씨|은진]]으로 문정공 우암 [[송시열]]의 9대손이다.
53번째 줄:
}}</ref> 우연히 세도가 [[민태호]]의 눈에 띄었는데, 달변과 민첩한 행동으로 그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이후 [[민태호]]의 애첩인 홍씨 집에서 일하게 되었고, [[민영환]](閔泳煥) 집안의 식객(食客)생활을 했다.
 
일설에는 자신의 생모와 같은 가문 사람인 민태호의[[민태호]]의 첩 홍씨를 어머니라고 불렀다고 한다.
 
=== 관료 생활과 정치 활동 ===
67번째 줄:
|쪽=63쪽}}</ref>
 
1876년 [[강화도 조약]] 때 접견사 수행원으로서 구로다 일행을 접대하였다. 그 뒤 송병준은 [[구로다]] 일행을 따라온 일본의 무역회사 대창조 사주인 오오쿠라와[[오오쿠라]]와 합작하여 부산에 상관을 차렸다. 이는 조선 역사상 최초의 한일 합작 상회인 셈이다. 당시 국법에 따르면 일본인과 합작하여 상행위를 할 수 없었으며, 더구나 송병준이 일본인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기 때문에 그에 격분한 부산 사람들이 그의 상관을 부숴 버렸다.<ref name="실록친일파" />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에는 간신히 피신하였다. 그를 좋지 않게 본 사람들이 그의 집을 불태웠고, 그는 남대문 밖 농가의 쌀뒤주에서 열흘쯤 숨어 지내야 했다. [[1884년]] [[갑신정변]] 때에도 사람들이 그의 집을 불태웠고, 그는 겨우 도망하여 살아남았다. 샤쿠오(釋尾東邦)는 《조선병합사》에서 “일본의 감독이 없는 고종 치하와 조선인 내각 밑에서는 … 생명이 위태롭다”라고 송병준이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쓰기도 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며, 송병준은 그 뒤로도 요직을 두루 섭렵하였다.<ref name="실록친일파" />
76번째 줄:
그 뒤 [[조선]]에 귀국하였는데, [[1877년]]때 일본인과 같이 상회를 차린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민태호]]의 양아들인 [[민영환]]의 주선으로 출옥하였으나, 86년에는 그와 함께한 [[조선]]인 밀정의 밀고에 의해 [[김옥균]]과 통모한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다시 출옥하였다.
 
이후 흥해군수[[흥해]]군수·양지현감[[양지]]현감(陽智縣監) 등을 역임하다가 [[1897년]] 정부로부터 체포령이 내려져 다시 일본으로 피신했다. [[김옥균]]의 암살 소식을 듣고 그는 황제와 조정에 대해 반감을 품게 되었다. 이후 [[조선인]]임을 포기하고 [[노다 헤이치로]](野田平治郞)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은신하며, [[야마구치현]](山口縣)에서 잠업(蠶業)과 밭 농사, 막노동에 종사하면서 숨어 지냈다. 체력이 좋았던 그는 보통의 사대부와는 다르게 거친 공사장 인부일을 하였다.
 
==== 을사 조약 전후 ====
83번째 줄:
[[헤이그 밀사사건]]이 실패로 돌아간 후에는 [[대한제국 고종|고종]] 황제 양위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 때문에 [[1907년]] [[대한제국 고종|고종]] 퇴위 후 노상에서 피습을 당하기도 했다.
 
[[1907년]] [[이완용]] 내각이 들어서자, [[농상공부대신]]·내부대신을[[내부대신]]을 지내면서 [[일진회]]의 〈[[일한합방상주문]]〉 제출을 조종하는 등 [[대한제국]] 국민들이 “합방”을 간절히 원하는 듯 한 여론을 조작, 조성하는 데 앞장섰다. 그 후 다시 일본에 건너가 국권피탈을 위한 매국외교를 하여 전국민의 비난과 지탄을 받았다.
 
=== 한일 합방의 배후 ===
172번째 줄:
 
== 가족 관계 ==
일설에 그가 양반가의 서출이었다고[[서출]]이었다고 하지만 이는 송병준의 주장일 뿐 실제로 송병준은 민태호의[[민태호]]의 양자로 들어가는 등 고아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의 출생에 의혹이 있으며 성씨 또한 증거로 삼을 수 있는 족보나 자료가 없다. 그래서 당대 문벌 명문가중 하나인 은진 송씨 집안에서 식객생활을 하다가 성씨를 사칭하며 민태호의 양자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생모는 기생 홍씨로 알려졌는데 민태호의 식객 생활을 하면서는 당시에 그의 첩인 홍씨를 어머니로 불렀었으니 그의 출생에 한층 의혹이 가는 부분이다. 또한 그의 사위 중 한 사람인 [[구연수]]는 [[을미사변]] 당시 조선인 고위 협력자 중 한 사람이었다.
일제 시대에 8명의 첩을 부인으로 거느렸다고 한다.
 
* 어머니: 덕상 홍씨 (기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