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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송병준 (방송인)||대한민국의 방송인, 대중음악 작곡가}}
{{
|이름 = 송병준
|원래 이름 = 宋秉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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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준'''(宋秉畯, [[1857년]] [[음력 8월 20일]] ~ [[1925년]] [[2월 1일]])은 [[조선|조선 시대 말기]]에 활동한 무관이다. 조선국 사헌부 감찰 등을 지냈다.
[[정미칠적]] 중 일원이며 [[한일 합병 조약]] 체결 과정에서도 [[일진회]]를 통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무과]] 급제 후 무관으로 활동하다가 [[김옥균]]을 암살 밀명을 받고 [[일본]]에 건너갔지만 오히려
본관은 [[은진 송씨|은진]]으로 문정공 우암 [[송시열]]의 9대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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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우연히 세도가 [[민태호]]의 눈에 띄었는데, 달변과 민첩한 행동으로 그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이후 [[민태호]]의 애첩인 홍씨 집에서 일하게 되었고, [[민영환]](閔泳煥) 집안의 식객(食客)생활을 했다.
일설에는 자신의 생모와 같은 가문 사람인
=== 관료 생활과 정치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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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63쪽}}</ref>
1876년 [[강화도 조약]] 때 접견사 수행원으로서 구로다 일행을 접대하였다. 그 뒤 송병준은 [[구로다]] 일행을 따라온 일본의 무역회사 대창조 사주인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에는 간신히 피신하였다. 그를 좋지 않게 본 사람들이 그의 집을 불태웠고, 그는 남대문 밖 농가의 쌀뒤주에서 열흘쯤 숨어 지내야 했다. [[1884년]] [[갑신정변]] 때에도 사람들이 그의 집을 불태웠고, 그는 겨우 도망하여 살아남았다. 샤쿠오(釋尾東邦)는 《조선병합사》에서 “일본의 감독이 없는 고종 치하와 조선인 내각 밑에서는 … 생명이 위태롭다”라고 송병준이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쓰기도 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며, 송병준은 그 뒤로도 요직을 두루 섭렵하였다.<ref name="실록친일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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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조선]]에 귀국하였는데, [[1877년]]때 일본인과 같이 상회를 차린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민태호]]의 양아들인 [[민영환]]의 주선으로 출옥하였으나, 86년에는 그와 함께한 [[조선]]인 밀정의 밀고에 의해 [[김옥균]]과 통모한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다시 출옥하였다.
이후
==== 을사 조약 전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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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밀사사건]]이 실패로 돌아간 후에는 [[대한제국 고종|고종]] 황제 양위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 때문에 [[1907년]] [[대한제국 고종|고종]] 퇴위 후 노상에서 피습을 당하기도 했다.
[[1907년]] [[이완용]] 내각이 들어서자, [[농상공부대신]]·
=== 한일 합방의 배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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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관계 ==
일설에 그가 양반가의
일제 시대에 8명의 첩을 부인으로 거느렸다고 한다.
* 어머니: 덕상 홍씨 (기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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