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절: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1번째 줄:
[[파일:Israel's_Escape_from_Egypt.jpg|대체글=|섬네일|유월절 이후 애굽(이집트)으로부터 탈출하는 이스라엘]]
{{유대교}}
'''페사흐'''({{llang|he|פסח}}) 또는 '''유월절'''(逾越節), '''과월절'''(過越節), '''파스카'''({{llang|grc|πάσχα}}) 또는 '''페사흐'''({{llang|he|פסח}})는 유대인들이 [[이집트 신왕국]]의 노예 생활로부터 탈출한 사건을 기념하는 날로, [[유대교]]의 3절기 중 봄에 지내는 절기이다. 때문에 '하그 에 아비브'(봄축제)라고도 하며 노예 생활로부터의 탈출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즈만 헤루테누'(자유의 때)라고도 한다. 날짜는 [[유대력]] [[니산월]](1월) 15일에 시작된다.([[레위기]] 23:5).
 
== 개요 ==
27번째 줄:
[[할례]]를 받아야 유월절을 지킬 수 있다.<ref>{{웹 인용|url=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00549|제목=[권혁승 칼럼] 길갈에서 행한 할례|성=크리스천투데이|날짜=2017-05-24|확인날짜=2020-03-09}}</ref><ref>{{웹 인용|url=https://ko.wikisource.org/wiki/%EA%B0%9C%EC%97%AD%ED%95%9C%EA%B8%80%ED%8C%90/%EC%B6%9C%EC%95%A0%EA%B5%BD%EA%B8%B0#12%EC%9E%A5|제목=개역한글판/출애굽기 12:48-49|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2020-03-09|인용문=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하여 지킬지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본토인에게나 너희 중에 우거한 이방인에게나 이 법이 동일하니라 하셨으므로}}</ref>
 
=== 제 2 유월절제2유월절 ===
제 2 유월절은제2유월절은([[영어]]: Second Passover, [[히브리어]]: פסח שני) 매년 2월 14일에 열리는데, 이것은 유월절인 1월 14일로부터 딱 한달 째 되는 날이다. 유월절 날에 이르러 시체를 만진다던지 하는 율법상 부정한 상황이 되었을 때, 2월에 유월절을 지킬 수 있도록 율법을 내려주신 것에 의해 생긴 절기이다. 연간 절기 중에 2번에 걸쳐 기회를 주는 절기는 딱 유월절 뿐이다.
 
====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킨 제 2 유월절제2유월절 ====
모세는 제 2 유월절을제2유월절을 광야에서 지켰는데, 이는 여행이나 부정함으로 인해 유월절을 정기에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ref name=":0">{{웹 인용|url=https://pasteve.com/the-second-passover/|제목=두 번째 유월절(The second Passover) - 2월 유월절, 제 2유월절의 유래|날짜=2018-04-26|언어=ko-KR|확인날짜=2021-02-02}}</ref>{{quote|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나 너희 후손 중에 시체로 인하여 부정케 되든지 먼 여행 중에 있든지 할찌라도 다 여호와 앞에 마땅히 유월절을 지키되 이월 십사일 해 질 때에 그것을 지켜서 ..|[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민수기#9장&#124; 민수기 9:10-11]}}
 
==== 히스기야가 지킨 제 2 유월절제2유월절 ====
[[히즈키야|히스기야]]는 제2유월절을 2지켰다. 유월절을 지켰는데,이는 유월절을 모르고 있다가, 율법책에서 발견하고 지키려고 했는데, 1월 유월절에 제사장도 부족하고, 백성들이 다 모이지 못했기 때문이다.<ref name=":0" />{{quote|히스기야가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 보내고 또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편지를 보내어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에 와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니 ... 이월에 유월절을 지키려 하였으며 이는 성결케 한 제사장이 부족하고 백성도 예루살렘에 모이지 못한고로 그 정한 때에 지킬 수 없었음이라 ... 이월 십사일에 유월절 양을 잡으니 ...|[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역대하#30장&#124; 역대하 30:1-3,15]}}
 
== 유월절을 폐지했다는 주장에 대한 기독교 입장 ==
[[교부들의 신앙]]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교황 빅토르 1세|성 빅토르 교황]](189~199년 재임) 때, 예수 부활 축일을 소아시아 각 지역 교회에서는 유다인의 파스카, 즉 니산달 14일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을 기념하고 나서 같은 달 16일에 지내고, 로마에서는 니산달 14일 다음에 오는 주일에 지냈었다. 지금처럼 부활 축일을, 춘분(3월 21일) 다음에 오는 보름 후 첫 주일에 지내게 된 것은 325년의 니체아 공의회에서 결의된 다음의 일이다.”<ref>{{서적 인용|제목=교부들의 신앙|성=제임스 C. 기본스|이름=|날짜=|판=|출판사=가톨릭출판사|쪽=P. 139|장=|isbn=9788932103082}}</ref>
== 유월절을 폐지의 역사 자료 ==
 
위의 내용은 유월절 자체를 가톨릭에서 폐지했다는 게 아니라 부활절 날짜의 기준을 유대력에서 그레고리력으로 바꾼 결정을 의미한다.
 
== 제1차 니케아 공의회와 주요 의제 ==
유월절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 것은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공의회]]를 통해서다. 사상 첫 공의회였던 1차 회의는 325년 5~6월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소집해 황제의 별궁에서 열렸다. 당시 황제는 제국 내의 동·서방 교회 주교 약 1,800명을 초대했고, 250~318명의 주교들이 참석했다고 전해진다. 동·서방 교회의 오랜 갈등을 종식시키고 기독교회의 교리를 통일시켜 제국의 안정을 꾀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니케아 공의회를 묘사한 16세기 프레스코화
유월절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 것은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서다. 사상 첫 공의회였던 1차 회의는 325년 5~6월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소집해 황제의 별궁에서 열렸다. 당시 황제는 제국 내의 동·서방 교회 주교 약 1,800명을 초대했고, 250~318명의 주교들이 참석했다고 전해진다. 동·서방 교회의 오랜 갈등을 종식시키고 기독교회의 교리를 통일시켜 제국의 안정을 꾀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주요 의제로는 동·서방 교회 간의 오랜 논쟁거리였던 두 가지 문제가 상정되었다.
 
하나는 ‘파스카 논쟁’이다. 당시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 교회는 이미 유월절에 행하던 성찬식을 부활절에 행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교회는 동방의 교회들이 니산월 14일 유월절에 성찬식을 행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성찬식 행하는 날을 한 날로 통일하고자 했다.
 
또 하나는 ‘아리우스 논쟁’이다. 아리우스 논쟁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였던 아리우스가 예수는 신이 아니라 피조물에 불과하고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비롯되었다. 이 문제는 격렬한 논란을 일으켜왔다.
 
유월절의 날짜는 1월 14일로 성경에서도 예언되어 있는 중요한 절기이다.
 
하나는 ‘파스카 논쟁’이다동·서방 교회 간의 오랜 논쟁거리로 [[아리우스파|아리우스]] 논쟁과 함께 파스카 논쟁이 제기되었다. 당시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 교회는 이미 유월절에 행하던 성찬식을 부활절에 행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교회는 동방의 교회들이 니산월 14일 유월절에 성찬식을 행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성찬식 행하는 날을 한 날로 통일하고자 했다.
" 에스겔 45:21 KOR 정월 십 사일에는 유월절 곧 칠일 절기를 지키며 누룩 없는 떡을 먹을 것이라 "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