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천문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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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천문학'''(韓國-天文學)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 선사시대 ==
선사시대의 [[고인돌]] 덮개돌에서 별자리의 모양이 발견되었다.
 
== 삼국시대 ==
한국의 역대 왕조는 천상(天象)을 국가와 왕자(王者)의 안위(安危)를 내다보기 위한 점성적(占星的)인 것으로 보았으며, 특히 [[일식|일]]·[[월식]]의 예언은 곧 국가적 권위를 백성들에게 과시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러한 하늘의 현상에 대한 민감성은 천문학을 발전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기원전 108년 [[한사군]] 설치 이후 중국 한대문화(漢代文化)가 유입되면서 중국의 우주관인 개천설(蓋天說)과 혼천설(渾天說)이 들어와서 4·5세기경에는 삼국의 천문학 속에 토착화되었다. 그것은 먼저 [[고구려]], 다음에는 [[백제]]와 [[신라]]에서 그 영향이 발견된다. 고구려의 여러 고분(古墳)에 그려진 일월성신도(日月星辰圖)와 그 구조의 특징에서, 특히 백제와 신라의 [[천문대]]에서 제1차적 개천설, 즉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적 상징을 찾을 수 있다.<ref>삼국시대의 천문학, 《글로벌 세계 대백과》</ref>
 
대표적인 천문대로는 신라의 [[첨성대]], 고구려의 첨성대와 백제의 점성대를 들 수 있다. 이 중 고구려의 첨성대는 그 터가 발굴되었다는 보도가 있으며<ref>[http://news.donga.com/Politics/New/3/00/20111012/41032976/1 北 “평양서 고구려 첨성대터 발굴”], 《동아일보》, 2011.10.12.</ref>, 백제의 점성대(占星臺)는 기록만 남아 있다.
 
== 고려시대 ==
천문학에 있어서는 천체관측이 특히 발달하였으며, 그 관측기록은 독자적이고 정확한 것으로 정평이 있다.<ref>고려시대의 과학기술, 《글로벌 세계 대백과》</ref>
 
개성 만월대 서쪽에 세운 [[개성 첨성대]]가 보존되어 있다.
 
== 조선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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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전기 ===
[[조선 세종|세종]] 15년(1433년)에는 천문관측 의상(儀象)인 [[혼천의]](渾天儀)를 완성하였고 또한 [[간의대]](簡儀臺)와 간의(簡儀)를 두어 본격적인 천문학 발전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이어서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와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었고 자주적 역법(曆法)의 확립을 위하여 [[역서]](曆書)인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간행하니 조선의 역법은 완전히 정비되었다. 그러나, 우주의 본질과 체계에 관한 이론은 중국 고대의 혼천설(渾天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ref>조선 전기의 천문학, 《글로벌 세계 대백과》</ref>
 
;역법
조선은 고려에 이어 대통력(大統曆)을 썼지만 일월교식(日月交蝕) 및 5성(星)의 행도(行度)는 [[곽수경]](郭守敬)의 [[수시력]](授時曆) 시행 이후 그 산술(算術)을 알지 못하여 세종대까지의 조선의 역서(曆書)에는 일월교식 및 5성의 두 부분을 빼놓지 않을 수 없었다. 세종은 그것을 추보(追補)하여 보완케 하였고, 세종 15년(1433) 정인지(鄭麟趾), 정초(鄭招), 김담(金淡), 이순지(李純之) 등의 학자들에게, 그간자주적 연경역법(燕京曆法)을 표준으로 추산한 역서를 교정하지 않고 사용한 데서 온 착오를확립을 해소하기위하여 위해서, 역서인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찬하도록 하였다. 《칠정산내외편》의 완성으로 조선의 역법은 완전히 정비되어, 이 때부터 대통력을 ‘중국력’이라 하였고 《칠정산내편》은 본국력(本國曆)이라 했으니 조선은 오랫동안의 중국역법 의존에서 어느 정도 독자적 역법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를 수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연산군]] 10년(1504년) 12월에는 처음으로 한글로 된 역서의 간행을 계획하여 번역을 하게 하는 등 역서의 보급이 일반화되어 갔다. 그러나 [[조선 성종|성종]] 대 이후 차츰 침체하기 시작한 조선의 천문학과 수학은 [[조선 선조|선조]](宣祖) 대에 [[임진왜란]]의 극심한 전화(戰火)를 치르고 난 후 더욱 급격히 침체화하여 독자적 역법의 계산이 점점 어려워지게 되었다.<ref>조선전기의 역법, 《글로벌 세계 대백과》</ref>
 
=== 조선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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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체 관측 ===
{{본문|천체 관측#한국의 천체 관측}}
《[[증보문헌비고]](增補文南犬備考)》 〈상위고(象緯考)〉 《[[조선왕조실록]]》《[[서운관지]](書雲觀志)》
조선의 전후기를 통한 일식관측기사(日蝕觀測記事)를 《[[증보문헌비고]](增補文南犬備考)》 〈상위고(象緯考)〉에서 종합하여 보면, 총계 190회에 달한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일월식 기사에 의하면, 당시 관측규정은 《[[서운관지]](書雲觀志)》의 일월식관측 규정대로 식(蝕)의 시각과 시간, 방향, 정도 등을 관측하고 도시(圖示)하였다. 조선의 전후기를 통한 혜성관측기록은 모두 103회에 달한다. 이 밖에도 수백회에 달하는 [[태양]]의 [[흑점]](黑點), [[유성]](流星), [[성운]](星隕) 및 유성우[星隕雨] 등의 관측기록이 남아 있다.<ref>조선의 천체관측, 《글로벌 세계 대백과》</ref>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