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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조(사도세자)의 추숭과 복권은 정조의 오랜 숙원이었으나 진행이 쉽지는 않았다. 세자 시절 대리청정을 시작하며 정조는 장조(사도세자)의 묘를 배알하고 영조가 장조(사도세자)를 죽인 “임오년 처분”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상소를 올렸고, 영조 역시 이 일을 언급하는 자는 왕법으로 처단하라는 유훈을 남겼다. 정조 즉위 직후 노론 측이 장조(사도세자) 문제를 거론하며 재조사를 요구하자 정조는 홍국영을 앞장세워 이들을 사형에 처했다. 이 일로 정조는 소론이 장악하고 있는 조정에서 그들의 의구심을 풀 수 있었지만, 사실상 정적인 노론 벽파를 견재할 수단을 잃은 셈이었다.<ref>이덕일, 《조선 왕을 말하다 2》, 역사의아침, 2010년, {{ISBN|978-89-93119-23-7}}, 306-307쪽</ref> 정조가 장조(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고 다시 추숭사업을 시작한 것은 그 뒤로 13년이 흐른 뒤였다.<ref>이덕일, 《조선 왕을 말하다 2》, 역사의아침, 2010년, {{ISBN|978-89-93119-23-7}}, 334-336쪽</ref>
=== 홍국영의 득세와 몰락 ===
{{참고|홍국영|세도 정치}}
[[1777년]](정조 1년) 7월, 괴한이 경희궁에 침입하자 정조는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8월에 다시 괴한이 침입하다 잡혔는데 조사 결과 정조의 외척인 홍상범, 홍계능 등이 유배되어 있던 홍술해와 모의하여 반정을 꾀한 것이 드러났다. [[홍국영]]이 이 사건을 책임지고 처리하였다. 홍국영은 이들이 추대한 [[은전군]]을 자진하도록 조치하고 홍술해, 홍상범에게는 사형을 내렸으며, 홍계능은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정후겸의 양모인 [[화완옹주]]는 교동으로 유배되었다. 이렇게 하여 정조 즉위 1년 안에 즉위에 반대하였던 세력은 [[정순왕후 (조선 영조)|정순왕후]]의 오라비인 [[김귀주]]만이 무사하였을 뿐 모두 제거 되었다.<ref name="ReferenceA">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5:문화군주 정조의 나라 만들기》, 한길사, 2001년, {{ISBN|978-89-356-5154-2}}, 28쪽</ref>
 
이후 정조는 홍국영을 특별히 발탁하여 [[동부승지]]로 삼았다가<ref>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va_10003013_001&tabid=k 정조 1권, 즉위년 3월 13일(갑신) 1번째기사 / 홍국영을 승정원 동부승지로 삼다]</ref> 다시 [[도승지]]로 올렸고<ref>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va_10007006_006&tabid=k 정조 1권, 즉위년 7월 6일(을해) 6번째기사 / 홍국영을 승정원 도승지로 삼다]</ref> 임금의 호위를 위한 숙위소를 설치하여 홍국영을 숙위대장에 임명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va_10111015_002&tabid=k 정조 4권, 1년 11월 15일(정축) 2번째기사 / 홍국영을 숙위 대장으로 삼고 대장이 차는 대장패·전령패의 격식을 정하다]</ref> 전례가 없던 이러한 조치로 홍국영은 막강한 실권을 쥐게 되었다. 홍국영은 정조의 신임을 업고 모든 정사에 관여하여 삼사<ref group="주해">[[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을 말한다</ref>의 소계<ref group="주해">疏啓, 상소문과 계문. 상소문은 원칙적으로는 백성 누구나 올릴 수 있는 것이었고 계문은 관원이 올린 글이다.</ref>, 팔도의 장첩<ref group="주해">狀牒, 지방 관리가 올린 보고서</ref>, 묘염<ref group="주해">廟剡. [[의정부]]에서 천거하여 관리를 뽑는 일</ref>, 전랑<ref group="주해">銓郎, 조선시대 문무관의 인사행정을 담당하던 이조와 병조의 정5품관인 정랑(正郎)과 정6품관인 좌랑(佐郎)직의 통칭</ref> 직의 인사권 등을 모두 총괄하였고 이에 따라 백관들은 물론 8도감사나 수령들까지도 그에게 머리를 숙이게 되었다. 홍국영의 이러한 득세는 실권을 쥔 [[세도 정치]]의 시작으로 평가된다.<ref name="박영규">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지식하우스, 2013년, {{ISBN|89-01-04754-3}}, 437쪽</ref>
 
정조는 세자 시절부터 늘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ref>한국사특강위원회,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년, {{ISBN|89-7096-115-1}}, 184쪽</ref> 정조는 즉위 초기 반대 세력에 둘러쌓여 있었기 때문에 홍국영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 6월 23일 정후겸과 홍인한의 수하였던 윤약연, 홍지해 등을 친국하면서 소론이 홍국영을 제거하려고 한 시도에 대해 세자시절 “옷을 벗지 못하고 자는 수가 또한 몇 달인지를 알 수 없었으니, 저궁의 고립과 위태함이 어떠했고 국가 사세의 간난(艱難)함이 어떠했겠는가?”라며 오직 홍국영이 자신을 보호하였다고 언급하면서 “홍국영에 있어서는 궁료(宮僚)로 있을 때부터 임금의 몸을 보호해와 한쪽 손으로 하늘을 떠받치는 공로가 있었으니, 무릇 이 사람을 장해(狀害)하려는 흉계를 하는 사람은 곧 우익을 제거해 버리려는 흉심이 있는 것이다. 즉조(卽祚)한 이후 …… 오직 이 하나의 신하를 의지하여 믿고 있는데 기필코 장살하고야 말려고 하니, 마음 속에 생각하고 있는 바가 장차 어느 지경까지 가려는 것인가?”라고 하여<ref>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va_10006023_001&tabid=k 정조 1권, 즉위년 6월 23일(임술) 1번째기사 / 윤약연·홍지해 등을 친국하고 절도에 정배하라 명하다]</ref> 홍국영에 대한 신임을 보였다.
 
그러나 홍국영은 사사로운 관계에 따라 인사를 전횡하는가 하면, 영조의 계비이자 정조에게는 할머니가 되는 [[정순왕후 (조선 영조)|정순왕후]]가 독단적인 한글 전교를 통해 후궁을 간택한다고 하자 자신의 누이를 [[원빈 홍씨|원빈]]으로 들이는 등 무리한 권력 강화를 시도하였다.
 
홍국영 몰락의 직접적 원인은 확실하지 않다. 원빈이 왕비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믿어 이를 보복하려고 왕비의 음식에 독약을 넣다가 발각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ref name="박영규" /><ref name="이이화15_31">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5:문화군주 정조의 나라 만들기》, 한길사, 2001년, {{ISBN|978-89-356-5154-2}}, 31쪽</ref> 그러나, 홍국영 몰락의 근본적인 원인은 자신이 지나치게 권력을 탐한 것과, 외척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억제하는 정조의 정책에 반해 스스로가 외척이 된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ref name="역비1997_191">역사문제연구소, 《바로 잡아야 할 우리 역사 2》, 역사비평사, 1997년, {{ISBN|89-7696-218-4}}, 191-192쪽</ref> 현경왕후는 《[[한중록]]》에서 원빈이 죽자 홍국영이 [[효의왕후]]를 의심하여 내전의 나인을 함부로 국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ref>혜경궁 홍씨, 《한중록》, 문학동네, 2011년, {{ISBN|89-546-0891-4}}, 395쩍</ref>,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 담(憺)을 앞세워 왕위계승권에 관여하려 한 것도 정조가 홍국영을 축출한 원인이 될 것이다.<ref name="역비1997_191" />
 
[[1779년]](정조 3년) 홍국영은 도승지를 사임하였고<ref>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va_10305024_001&tabid=k 정조 7권, 3년 5월 24일(정미) 1번째기사 / 도승지 홍국영을 체직시키고 유언호를 도승지에 제수하다]</ref> 정조는 홍국영에게 백마와 금전을 선물로 주며 낙향시켰다.<ref>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va_10309028_002&tabid=k 정조 8권, 3년 9월 28일(기유) 2번째기사 / 홍국영에게 선마하고 서로 작별인사를 하다]</ref> 홍국영은 낙향한 이후 탄핵 상소가 이어져 강원도 [[횡성]]과 [[강릉]] 등지로 방출되었다가 1781년(정조 5년) 사망하였다. 정조는 홍국영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이 사람이 이런 죄에 빠진 것은 참으로 사려(思慮)가 올바른 데 이르지 못한 탓이다. 그가 공을 세운 것이 어떠하였으며, 내가 의지한 것이 어떠하였었는가? 처음에 나라와 휴척(休戚)을 함께한다는 것으로 지위가 중하지 않으면 위엄이 서지 않았기에 권병(權柄)을 임시로 맡겼던 것인데, 그가 권병이 너무 중하고 지위가 너무 높다는 것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스스로 삼가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서 오로지 총애만을 믿고 위복(威福)을 멋대로 사용하여 끝내는 극죄(極罪)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건대, 이는 나의 허물이었으므로 이제 와서는 스스로 반성하기에 겨를이 없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라며 스스로를 탓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va_10504005_003&tabid=k 정조 11권, 5년 4월 5일(무신) 3번째기사 / 홍국영의 졸기]</ref>
 
=== 왕권강화와 정치개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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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명부 ====
[[내명부]](內命婦)는 조선시대 궁중에 있는 왕비와 후궁, 그리고 이들을 모시는 여자 관리인 궁녀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ref>이배용 외, 《우리 나라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청년사, 1999년, {{ISBN|89-7278-335-8}}, 249쪽</ref> 정조는 주위의 [[궁녀]]들을 통해 [[정순왕후]]가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고 보고, 즉위 후 대전 소속의 궁녀를 없애 왕의 주변에 궁녀를 두지 않도록 하였다.<ref name="ReferenceA">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5:문화군주 정조의 나라 만들기》, 한길사, 2001년, {{ISBN|978-89-356-5154-2}}, 28쪽</ref> 중전 소속의 궁녀도 없애려 하였으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ref>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5:문화군주 정조의 나라 만들기》, 한길사, 2001년, {{ISBN|978-89-356-5154-2}}, 30쪽</ref> 정조는 세자 시절부터 여러 차레 암살 위험에 시달렸는데 즉위 후 일어난 암살 사건에 정순왕후 휘하의 궁녀가 관련되었다.<ref>이덕일, 《조선 왕 독살사건 2》 , 다산초당, 2009년, {{ISBN|89-93285-72-1}}, 196쪽</ref>
 
[[정순왕후 (영조)|정순왕후]]는 15세의 어린나이에 66세의 [[조선 영조|영조]]의 계비가 되었고, [[조선 영조|영조]]가 승하하자 대왕대비(大王大妃)가 되어 왕실의 가장 높은 어른이 되었다. 정조 즉위시 [[정순왕후 (영조)|정순왕후]]의 나이는 불과 31세였다. 정조와 대척점에 있던 정순왕후는 오라비인 [[김귀주]]가 유배 도중 사망한 뒤로 정조를 원수로 여겼다. [[1786년]](정조 10년) 김귀주가 사망한 이후 정조의 후궁인 의빈 성씨에게서 옹주를 얻었다. 옹주, 문효세자, 의빈성씨가 차례로 사망한 후 12월 1일 정순왕후는 한글로 된 교서를 승정원에 보내어 이들의 죽음이 수상하니 범인을 찾으라고 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va_11012001_002&tabid=k 정조 22권, 10년 12월 1일(경자) 2번째기사 / 홍국영 상계군 이담 등의 역적됨을 왕대비(王大妃)가 빈청에 언문으로 승정원에 전하다]</ref> 정순왕후는 상계군 이담을 장조(사도세자)의 죽음에 연루시켜 정조의 이복동생이자 상계군의 아버지인 [[은언군]]을 죄인으로 몰았다. 은언군을 죽이라는 상소가 빗발쳤지만 정조는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이복동생을 어떻게든 살리려고 하였다. 은언군은 결국 강화도로 유배되었다.<ref>이덕일, 《조선 왕 독살사건 2》 , 다산초당, 2009년, {{ISBN|89-93285-72-1}}, 〈제5장 끝나지 않은 비극 - 사도세자의 후예들〉</ref> 은언군은 강화도에서 생을 마쳤다. 훗날 “강화도령”으로 널리 알려진 그의 손자 원범(元範)이 순조의 손자 헌종을 이어 [[조선 철종|철종]]으로 즉위한다.<ref>김대홍, 《그 골목이 말을 걸다》, 넥서스BOOKS, 2011년, {{ISBN|89-5797-349-4}}, 306-307쪽</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