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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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6.2.242(토론)의 32634829판 편집을 되돌림. 최근 중국 24사가 한국어로 국역된 이후 역사계에서 새로운 연구들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중국 24사 중 하나인 한서(漢書)에 조선은 연(燕)나라의 옛 영토였고 조선왕 만 또한 연나라 사람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연(燕)의 영토가 현대 베이징에 위치했다는 것은 한국측 뿐만 아니라 중국역사계의 정설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최근 연구발표 된 학계 논문 각주들이 붙은 내용들을 모두 삭제해 버리시는 행위는 올바르지 않습니다. 다른 시각을 갖고 계신다면 그것을 반영하는 학계 자료들을 가져오시고 문제를 제시하고 싶으시다면 토론 문서에 주제를 올리세요. 문서에서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kci 에서 발췌된 논문 내용들을 훼손하는 행위가 계속 이어지면 곤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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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000년 경 [[춘추전국시대]]의 나라 중 하나인 [[연 (춘추전국)|연]](燕)나라가 강성하여 수도인 계(薊)가 오늘날 베이징(北京)이 있는 곳에 건립하고 [[고조선]]의 중심지인 심양 일대([[선양시]])까지 진출하였다.<ref>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782281</ref>
 
고구려 건국 이후 기원후 8년 [[유리명왕]]때 한나라 [[왕망]]이 강제적으로 고구려인을 징발하려 하였다가 반란이 일어나 요서군의(유주(幽州) 태수가 죽임을 당하고 고구려가 한의 변방을 더욱 심하게 침범하였다고 [[삼국사기]]가 전한다.<ref>[http://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sg_013r_0030_0280#sg_013r_0030_0280_f004_comment 삼국사기 - 왕망이 연비를 죽이고 고구려왕을 하구려후라 부르다]</ref> 또한 고구려본기 [[모본왕]] 2년 기록에 [[고구려]]가 한나라 동북쪽 북평([[허베이성|하북성]] 중부)과 태원([[산시성 (산서성)|산시성]] 중서부) 지역을 공격했다는 [[삼국사기]] 기록들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1세기 초반까지는 베이징 북동부 지역까지 고구려가 진출하였다가<ref>[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26&totalCount=26&itemId=sg&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4&levelId=sg_014r_0040_004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D%83%9C%EC%9B%90&searchKeywordConjunction=AND 삼국사기 - 고구려본기 제2 모본왕 2년]</ref> 2,3세기 부여왕 위구태(尉仇台)와 후한의 협공에 밀려 그 지역을 다시 잃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기 (역사서)|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에 따르면 [[진나라|진(秦)나라]]가 [[연 (춘추전국)|연(燕)나라]]를 멸망시키고 후신인 한(漢)나라가 건국된 이후 조선땅이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옛 요새를 고쳐 패수(베이징 동북쪽)<ref>[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749143.html 한겨레 - 고조선-한나라 국경은? “란하”-“혼하” 팽팽히 맞서]</ref> 까지를 경계로 삼아 연에 속하게 하였다고 기록한다.<ref>[https://ko.wikisource.org/wiki/%EB%B2%88%EC%97%AD:%EC%82%AC%EA%B8%B0/%EA%B6%8C115 번역:사기/권115]</ref> 이후 기원전 108년 한(漢)나라가 [[위만조선]]의 [[왕검성]]을 함락시킨 뒤 [[한사군]]을 설치하며 현대 베이징을 포함한 랴오닝성과 허베이성 북쪽 지역을 관리하게 하였으나 계속되는 전쟁과 토착민들의 반발로 인해 한나라 중앙정부의 통치권을 거부하는 공지(空地)들이 생겨났다.<ref>[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318466 『사기』 「조선열전」 기재 ‘秦故空地上下鄣’에 대한 검토 -秦故空地上下鄣의 공간적 범위와 기능]</ref><ref>[https://books.google.com/books?id=lCrGDwAAQBAJ&pg=PT97&lpg=PT97&dq=%ED%95%9C%EB%82%98%EB%9D%BC+%EA%B3%B5%EC%A7%80(%E7%A9%BA%E5%9C%B0)&source=bl&ots=SXOXI7D7wb&sig=ACfU3U3DJydUD510PDU33TYGFX1BjIcV2A&hl=en&sa=X&ved=2ahUKEwjk6qfBpv32AhUyk4kEHalXAiUQ6AF6BAgfEAM#v=onepage&q=%ED%95%9C%EB%82%98%EB%9D%BC%20%EA%B3%B5%EC%A7%80(%E7%A9%BA%E5%9C%B0)&f=false 이덕일의 한국통사: 다시 찾는 7,000년 우리 역사. 고조선 -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갈등]</ref>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남겨진 [[한사군]] 공지(空地)의 고조선 유민 무리들 중 일부가 [[부여]]와 [[고구려]], 그리고 [[마한]]과 [[진한]]의 시초였다는 학계 주장도 존재한다.<ref>[https://www.joongang.co.kr/article/5147388#home 중앙선데이 - 고조선 유민 추, 옛 고죽국 땅서 고구려 건국 시동]</ref><ref>[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091528 고조선 기자정권의 쇠망과 그 유민들의 국가재건 -부여와 고구려의 경우- ]</ref>
 
고구려 건국 이후 기원후 8년 [[유리명왕]]때 한나라 [[왕망]]이 강제적으로 고구려인을 징발하려 하였다가 반란이 일어나 요서군의(유주(幽州) 태수가 죽임을 당하고 고구려가 한의 변방을 더욱 심하게 침범하였다고 [[삼국사기]]가 전한다.<ref>[http://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sg_013r_0030_0280#sg_013r_0030_0280_f004_comment 삼국사기 - 왕망이 연비를 죽이고 고구려왕을 하구려후라 부르다]</ref> 또한 고구려본기 [[모본왕]] 2년 기록에 [[고구려]]가 한나라 동북쪽 북평([[허베이성|하북성]] 중부)과 태원([[산시성 (산서성)|산시성]] 중서부) 지역을 공격했다는 [[삼국사기]] 기록들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1세기 초반까지는 베이징 북동부 지역까지 고구려가 진출하였다가<ref>[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26&totalCount=26&itemId=sg&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4&levelId=sg_014r_0040_004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D%83%9C%EC%9B%90&searchKeywordConjunction=AND 삼국사기 - 고구려본기 제2 모본왕 2년]</ref> 2,3세기 부여왕 위구태(尉仇台)와 후한의 협공에 밀려 그 지역을 다시 잃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에도 [[덕흥리 벽화고분]]에서 4세기 고구려가 현 베이징과 텐진 일대([[유주 (중국)|유주 지역]])를 관리하였다는 유주자사 진의 묘지명 발굴이 되며<ref>[https://ahcoc.net/%EC%9C%A0%EC%A3%BC%EC%9E%90%EC%82%AC-%EC%A7%84%E2%80%8B/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 유주자사 진]</ref><ref>[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ismy.d_0002_0040_0010 동북아역사넷 - 덕흥리 벽화고분(德興里壁畵古墳)]</ref> 고구려가 다시 베이징 북동지역을 재점령 했을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고조선]]의 멸망 이후 [[고구려]]와 [[부여]], [[한나라]], [[연 (춘추 전국)|연나라]], [[후연]], [[위 (삼국)|위나라]]가 옛 고조선의 유민들과 영토를 흡수한 뒤 베이징 부근에서 서로 영토를 침범하며 끊임없이 세력경쟁을 하였다는 학계의 연구 결과들이 존재한다.<ref>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336608</ref><ref>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657241</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