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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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은 강제로 그의 입에 음식을 넣었으나 모두 뱉거나 입을 열지 않고 저항하였다. [[1906년]] [[10월]]경 그는 [[풍증]]이 발병하였다. [[1907년]] [[1월 1일]] [[쓰시마섬]] 감옥에서 [[풍증]]과 [[단식]]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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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신의 운구와 장례식 ===
최익현의 유해는 [[1월 5일]] [[쓰시마]]에서 배편으로 [[경상남도]] [[동래부]] 초량(草梁)에 닿았다. '춘추대의 일월고충'(春秋大義 日月孤忠) 8자의 만장(輓章)을 앞세운 그의 영구(靈柩)는 연도에 수많은 인파가 늘어서 애도하는 가운데 구포, 성주, 황간, 공주 등지를 거쳐 [[1월 20일]] 청양의 본가에 도착, 무동산(舞童山) 기슭에 묻혔다. 1907년 논산군 상월면의 국도변에 안장했다가 뒤에 예산군 관음리로 이장했다. 문집으로는 《면암집》, 면암속집 등이 있다.
 
== 사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