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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초기 ===
==== 출생과 가계 (1899~1902) ====
장면은 [[1899년]] [[8월 28일]] 서울 [[종로구]] 적선동, [[삼군부]](三軍部) 건물 뒷골목 근처의 외가에서 죽정(竹亭) [[장잠]](張潛)의 후손인<ref name="jangssi">{{웹 인용 |url=http://www.indongjangssi.or.kr/3_people/search.htm?start=75 |제목=::::::: 인동장씨 홈페이지 :::::::<!-- 봇이 붙인 제목 --> |확인날짜=2008-07-09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50218224120/http://www.indongjangssi.or.kr/3_people/search.htm?start=75 |보존날짜=2005-02-18 |url-status=dead }}</ref> 장기빈과 황 루시아의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나 본가가 있는 [[인천]]에서 성장하였다. 서울 종로구 적선동 외가에서 태어난 장면은 인천에서 성장했다. 그래서 그를 인천 출신으로 보기도 하고 그의 아버지가 평남 출신이기 때문에 평남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ref name="hanjong44">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면, 윤보선, 박정희:1950년대초 주요 정치지도자 연구》 (백산서당, 2001) 44페이지</ref>
 
죽정 장잠은 [[조광조]]의 문하생으로 [[기묘사화]] 이후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고, 장잠의 손자인 장사진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공을 세웠다. 본래 장면의 선조는 [[경상북도]] [[인동]](仁同)에 살았으나, 장면의 8대조 [[장익붕]](張翼鵬)이 처가가 있는 [[평안북도]] [[성천군]](成川郡)으로 이주해 왔다. 그리고 장면의 고조부 [[장인각]](張仁珏)의 대에 [[평안남도]] [[중화군]]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아버지 장기빈은 16세에 평안남도를 떠나 [[인천]]으로 이주했고, [[대한제국]]의 세무 관료로서 [[탁지부]]에서 근무하다가 [[인천세관]]으로 발령받았다. 아버지 [[장기빈]]은 뒤에 천주교 신자인 [[장수 황씨]] [[황성집]](黃聖集)의 둘째 딸 [[황루시아]]와황루시아와 결혼하였는데, 아버지 [[장기빈]]과 어머니 [[황루시아]] 모두 독실한 [[천주교]]인으로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천주교 신자였다.
 
태어나기 전 어머니 황루시아는 성전으로 가기 전 진흙에서 섬광이 뻗어나오는 것을 보고 그 속에서 금가락지 5개를 얻는 꿈을 꾸었다 하고, 아버지 [[장기빈]]은 뒤뜰 아래 영롱한 깃털을 가진 특이한 동물을 품에 안는 꿈을 꾸었다 한다. 그의 외숙모는 밭 한가운데로 별이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한다. 모태신앙인이었던 그는 [[1899년]] [[9월 12일]] 부모를 따라 [[경성부]] [[명동성당|종현본당]]으로 가서 종현본당 주임신부 빅토르 신부에게 유아[[세례]]를 받았다. 그 뒤로 그는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천주교 교리에 위배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한다. 그는 나중에 총리가 되고서도 어머니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기도 하는 등 복종이 몸에 밴 인물이었다.<ref name="hanjong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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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름은 돌림자를 따서 지태(志兑)라 지었다가 후에 열심히 공부하라, 면학하라는 뜻에서 이름을 면(勉)이라 하였다.
 
소년기에 호를 운석이라운석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아버지 [[장기빈]]이 지어준 것으로 아버지 장기빈 자신의 호가 태암(太巖, 큰 바위)이었으므로 자녀인 장면 형제들의 호는 석(石, 돌)에서 따서 지었다. 그래서 장면의 호는 운석(雲石)이라 지었다.
 
유년기의 장면은 차분하고 온순한 성격이었다. 그는 나중에 국무총리가 되고 나서도 어머니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기도 하는 등 장면은 기도와 순종과 인내가 몸에 밴 인물<ref>정윤재, 〈장면 총리의 정치리더십과 제2공화국의 붕괴〉,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장면·윤보선·박정희: 1960년대초 주요 정치지도자 연구》(백산서당, 2001), 44쪽.</ref>로 성장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말수가 적었고 독서와 사색을 즐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