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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교육·외교 활동 ===
==== 유학과 신앙 활동 (1920 ~ 1929) ====
[[1920년]] 3월 경성 중앙기독교 청년회관(YMCA) 영어과를 졸업하고 장면은 대학교 진학을 위해 미국 유학을 추진하였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 천주교회를 설립하고 전교활동을 하던 메리놀 선교회에 그의 딱한 처지가 알려져 메리놀 선교회의 후원하에 그의 동생 [[장발 (화가)|장발]]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게 되었다. 같은해 1920년 10월 장면은 [[한국 천주교 청년회]] 대표자격으로 미국으로 유학, 6개월간 [[메리놀 신학원]]에서신학원에서 영어실력을 다듬었다. 이 곳에는 [[한국]]에서 [[천주교]] 전교 활동을 벌였던 [[패트릭 번]](한국명 방일은) 등이 강사로 있었고, 패트릭 번 신부는 영어담당 교사였다. [[1921년]] [[1월 4일]] [[메리놀 선교회]]에서선교회에서 운영하는 대학교 진학 예비과정(비정규 고등학교 과정)인 [[버나드 고등학교]](Bernard High School)에 입학하였다. [[1921년]] [[9월]] [[미국]] [[뉴욕]]의 [[맨하턴가톨릭대학]] [[영문학]]과(英文學科)로 진학, [[영문학]]외에 부전공으로 [[교육학]](敎育學)을 전공하였다.
 
[[파일:ChangMyon1920's.jpg|섬네일|200px|오른쪽|대학 재학 시절의 장면]]
 
집안으로부터 조금씩 도움을 받기는 하였지만 학비와 밥값을 벌어들이기 위하여 방학 기간과 여가를 이용하여 막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용돈을 조달하였으며<ref name="회고록036">장면,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9 증보판) 36페이지</ref>, 또 비용을 절약하기 위하여 자취생활을 하였다.<ref name="회고록036"/> 2학년 재학 중 발병하여 [[병원]]에 입원하여 1년 간 휴학하기도 했으며 이후 다시 복학하여 학업을 마쳤다. [[1925년]] [[6월]] [[맨하턴가톨릭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ref name="MBC" /> 졸업 직후 국내에 [[가톨릭]] 선교 사목에 뜻을 둔 그는 귀국을 결심한다.
 
그해 [[6월 30일]] [[이탈리아]]에 도착도착해, [[7월 5일]]에 [[로마]] [[바티칸 시티]]에서 열린 ‘한국인 79위 순교자’ 시복식에 한국인 신자 대표로 참석하고, [[7월 6일]] 당시 [[교황]]이었던 [[교황 비오 11세]]를 알현한 후 [[지중해]]와 [[인도양]]을 거쳐 40일의 항해를 마치고<ref name="회고록036"/> [[8월 29일]] 귀국하였다. 그는 귀국 후 평안남도 소재 메리놀센터 하우스의 어학교수로 부임하였고<ref name="unsuk"/> , [[1927년]]부터는 메리놀신학원 당시 은사였던 패트릭 번 신부가 있던 [[평양성당]]에평양성당에 근무하며 [[천주교 평양교구]]에서 활동하였다. [[1928년]] 평양 천주교회청년회 회장에 선출되었고, [[1928년]] 12월 미국 [[맨하탄 대학교]]에서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ref name="unsuk"/> [[1929년]] 10월 평양 시내 서포역전 평양천주교구 관리사무소에서 근무하였으며, 11월 영·한 천주교회 용어 사전인 ‘The Summary of Religious Terms’를 탈고, 출간하였다.
 
==== 신앙, 출판 활동 (1930 ~ 19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