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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8월 21일]] 소책자 《구도자의 길》을 출간하였고 이듬해 [[1931년]] [[3월 18일]] 천주교 평양대교구 사무직을 사퇴하고 경성부로 내려왔다. [[4월 1일]] 천주교 교인들의 추천으로 [[동성고등학교 (서울)|동성상업고등학교]] 교사로 초빙되었다. 1931년부터 동성상업학교의 교사로 부임해 [[1936년]]에 교장이 되어 해방 때까지 근무하였다.<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60년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79쪽.</ref> [[9월 15일]] 천주교 한국교구설정 백주년 기념 《조선천주공교회 약사》를 출간하였다. 1931년 동성상업학교 교사로 서무주임(행정실장)을 겸하였다.
 
천주교 서울교구장이던 [[원 라리보]] 주교의 측근으로도 활동하였다.<ref name="협조1">[http://www.nah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1258 "장면, 이승만의 최대 협력자"] 가톨릭뉴스 2009년 2월 6일자 기사</ref> [[1933년]] [[6월 10일]] 천주교 서울교구에서 원 라리보 주교와 주간 [[윤형중]](尹亨重) [[사제|신부]]를 중심으로 잡지 ‘가톨릭 청년보’를 발간하자 [[장발 (화가)|장발]](張勃)·이동구(李東九)·[[정지용]](鄭芝溶) 등과 함께 편찬위원으로 활약하였다.<ref>[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1g0740a 가톨릭청년 - Daum 백과사전<!-- 봇이 따온 제목 -->]</ref> 장면은 가톨릭 청년보에 칼럼과 기고문을 투고하였으며, 잡지는 [[1971년]]까지 발행되었다. 이 기간 중 그는 철저하게 비정치적인 칼럼과 글, 시를 발표했다.
 
그는 [[경성제국대학]] 예과에도 응시하였는데, [[1933년]] [[3월 29일]]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B조에 합격<ref>동아일보 1933년 3월 29일자 2면</ref> 하였다. 그러나 [[경성제국대학]] 문과 재학 중 중퇴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