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태그: 시각 편집 m 모바일 웹
편집 요약 없음
태그: 시각 편집 m 모바일 웹
136번째 줄:
{{참고|태평양 전쟁|창씨 개명}}
 
[[1939년]] 4월부터 [[1942년]] 8월까지 경성 계성국민학교 제3대 교장을 겸임하였고 [[1939년]] 9월 [[천주교청년회연합회]] 회장에 피선되었다.<ref name="MBC" /> 또한 조선교육심의회위원, 중등교육위원회위원을 지냈으며 [[1941년]] 이후 일제 당국의 [[창씨개명]] 강요에 따라 '''다마오카 쓰토무'''({{llang|ja|玉岡勉}})로 창씨개명을 하였다.
 
이때의이때 창씨개명 사실과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초청을 받은 것과 이때 촬영한 사진으로 인해 후일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과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당시 친일의 오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후반 조선총독부로부터 협력 압력을 받았고 총독부는 그에게 기방에 초청하는 등의 회유책을 쓰기도 했다. 그는 거절하지 않았다. [[1942년]] 8월에는 계성국민학교 교장직을 사임하였고 [[1944년]], 번역서 『[[교부들의 신앙]]』을 출간하였다. 광복 이후 조선교육심의회위원, 조선중등교육위원회위원에 선출되었고 [[1944년]] 8월에는 경성 계성국민학교의 제5대 교장으로 다시 부임하였다.<ref>[http://www.gyeseong1882.es.kr/?doc=sub/m14.php 서울계성초등학교 연혁]</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