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
편집 요약 없음 |
||
197번째 줄:
[[파일:Chang Myon signature.jpg|섬네일|왼쪽|100px|정계 입문 초기의 [[한자]] 서명, 한글, 영문 서명 등 다른 서명도 사용하였다.]]
1948년 [[12월 7일]]부터 [[12월 12일]]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 한국 수석 대표단으로 참석하였다. 대표단은 장면 이외에도 [[장기영 (1903년)|장기영]], [[김활란]], [[조병옥]], [[정일형]], [[전규홍]], [[모윤숙]],
{{인용문|존경하는 의장 각하, 회원국 대표 여러분! 본인이 유엔총회 본위원회에 참석하신 회원국 대표제위 앞에서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광영으로 생각합니다. ...(중략)... 이 자리에 참석하신 세계자유 애호국가 대표 여러분은 우리의 정당한 주장을 양심상 거부할 수 없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본인의 연설을 이로써 끝내려 합니다. 최후로 본인은 1947년 [[11월 14일]] 유엔 총회에서 결의한 바 있는 한국정부가 곧 본인이 대표하는 대한민국 정부 임을 재확인하고 우리 정부를 이 자리에서 공식으로 승인하는 동시에 모든 회원국가들이 또한 개별적으로도 승인하도록 권장하여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12월 7일 샤이요 궁에서 개최된 유엔 제3차 총회 제1(정치)분과위원회에서<br />한국독립문제에 관하여 대한민국 수석대표 장면이 행한 연설}}
[[파일:Changmyon-Chobysambd.jpg|섬네일|280px|오른쪽|[[1948년]] [[12월]] [[파리 (프랑스)|파리]] UN 총회에 파견된 [[대한민국]] 정부 대표단. 맨 앞줄 왼쪽이 [[조병옥]], 가운데가 대표단장 장면, 왼쪽은 [[장기영]], 뒷줄은 왼쪽부터 [[정일형]], [[모윤숙]], [[김활란]], 성명 미상,
[[소련]]의 반대와 반발 [[인도]] 등 중립국의 외면이 있었으나 그는 각국의 대표를 찾아다니며 대한민국 정부가 유일의 합법 정부임을 주장, 정부 승인을 해줄 것을 설득하였다. 제3차 [[유엔 총회]] 결과는 찬성 48개국, 반대 6개국, 기권 1개국으로 대한민국의 승인을 얻는 데 성공했다. [[유엔]]의 대한민국 정부 승인은 곧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기반이 되었다.<ref>[http://www.nah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1053 남한정부 유엔 승인, 장면과 바티칸에 힘입어] 가톨릭뉴스 2008년 12월 16일자</ref> 바티칸과 각국의 천주교 지도자들이 그를 도왔고, [[유엔 총회]]에 파견된 자국의 대표자를 설득하기도 하였고 일부의 부정적인 시각에도 대한민국 정부는 유일의 합법정부라는 승인을 얻을 수 있었다.
207번째 줄:
회의를 마치고 다시 바티칸으로 가서 [[12월 22일]] 로마에서 [[예수회]] 총장 방문·면담하고 한국에 예수회 대학 설립을 건의하였다. 이 부탁은 뒤에 성사되어 [[1960년]] 4월 [[서강대학교]] 설립에 바티칸의 지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로마 방문을 마치고 1948년 12월 말 장면은 미국 [[뉴욕주|뉴욕]]으로 건너갔다.
[[12월 27일]] 미국 방문 중 현지에서 주미 한국대사에 임명되었고, 재외공관 설치작업을 서두르게 된 [[이승만]]은 장면으로 하여금 미국에 그대로 머물러 주미 대사관 창설 작업을 착수하도록 지시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31200329204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3-12&officeId=00032&pageNo=4&printNo=9064&publishType=00020 | 제목 = 秘錄 韓國外交<26> : 政府樹立 직후 ⑧ 美中國에 特使館| 날짜 = 1975-03-12 | 출판사 = 경향신문}}</ref>[[12월 29일]] 미국
===== 초대 주미대사 부임 (1949 ~ 195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