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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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오딘지엠은 부유한 가톨릭 엘리트였고 식민지 정부의 관리였다. 이 때문에 다수의 베트남인들은 지엠을 프랑스 지배의 연장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게다가 베트남인 대다수가 믿고 있던 [[불교]]를 탄압하고 베트남을 가톨릭 국가로 만들려 한 지엠 정권의 종교 정책은 많은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1955년 초 여름 지엠은 반공 정책을 강화하여 공산주의자뿐만 아니라 다른 반정부인사들을 체포, 구금하고 고문하거나 처형하였다. 지엠은 정권에 반대하는 어떠한 움직임도 모두 공산주의로 몰았으며, 1956년 8월 다수의 반대 인사들이 [[사형]] 당하였다.<ref>{{웹 인용 |url=http://www.mtholyoke.edu/acad/intrel/pentagon/pent14.htm |제목=The Pentagon Papers Gravel Edition Volume 1, Chapter 5, "Origins of the Insurgency in South Vietnam, 1954–1960" |publisher=Mtholyoke.edu |accessdate=31 October 2011 |archive-date=2017-10-19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71019184424/https://www.mtholyoke.edu/acad/intrel/pentagon/pent14.htm |url-status= }}</ref> 디엠 정권의 [[정치적 박해]]로박해로 죽임을 당한 사람은 1955년에서 1957년 사이 12,000명에 달했고, 1958년까지 [[정치범]]으로 감옥에 수감된 사람의 수는 약 40,000명이나 되었다. 디엠 정권의 반공을 앞세운 독재는 민심 이반을 불러 대다수의 베트남인들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지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ref>''Anatomy of a War'' by Gabriel Kolko, {{ISBN|1-56584-218-9}}, p. 89.</ref>
 
응오딘지엠의 가장 큰 실책 가운데 하나는 토지 개혁 실패였다. 북쪽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공포정치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비엣민]] 시기 협력의 대상이었던 민족주의적 지주까지 예외 없이 토지개혁을 단행하였던 것과는 달리, 지엠 정권은 별다른 토지 개혁을 하지 않아 농민들의 이반을 자초하였다. 베트남의 대표적인 농업지역인 [[메콩 강 삼각주]]를 비롯한 농지는 프랑스 식민지 시기 이래 지역 인구의 2%인 지주가 전체 토지의 45%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엠 정권이 실시한 토지 개혁은 매우 미약한 것이었다. 1956년 미국의 압력으로 발표한 토지 개혁은 지주의 토지 보유 면적을 1.15km²로 제한하였으나, 지주들이 가족에게 토지를 이양하는 것을 허용하여 사실상 토지 개혁 자체가 무용지물이 되었다. 결국, 남베트남의 토지개혁으로 이익을 본 소작인은 10% 정도에 불과하였다. 이와 같은 남북의 토지개혁 차이는 농민들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지지하는 이유가 되었다.<ref name="WarBegan">[http://www.mtholyoke.edu/acad/intrel/pentagon/pent14.htm Origins of the Insurgency in South Vietnam, 1954–1960] {{웨이백|url=http://www.mtholyoke.edu/acad/intrel/pentagon/pent14.htm |date=20171019184424 }}, The Pentagon Papers (Gravel Edition), Volume 1, Chapter 5, (Boston: Beacon Press, 1971), Section 3, pp. 314–346; International Relations Department, Mount Holyoke College.</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