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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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hong Nhi massacre 2.jpg|섬네일|퐁니·퐁넛 학살에 희생된 어린이]]
 
주베트남 미군 사령관 웨스트모어랜드는 베트남 전쟁에서 [[수색 섬멸 작전]]을작전을 기반으로한 [[소모전]]을 기본 전략으로 세웠다. 이를 위해 농촌 지역의 주민들은 전략촌으로 소개되었고, 전략촌 이외 지역의 모든 사람들은 사실상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전투원으로 간주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적절한 조사나 재판 없이 혐의를 받았다는 것만으로 사살되었다. 미국 중앙정보부는 [[피닉스 전략]]을전략을 통해 1968년부터 1971년 중반까지 27,000 여명을 체포하여 20,000 여명을 처형하였다. 바던 오즈번은 [[다낭]] 시민의 2%를 베트콩 용의자로 색출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를 고발하였다. 1971년 열린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 오즈번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ref name="매클리어463">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 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년, {{ISBN|89-324-6081-7}}, 463-468쪽</ref>
 
{{인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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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즈번: 베트콩에 협조했다는 아무런 합리적 근거 없이 전원이 처형되었습니다.}}
 
이 청문회에서 미국 중앙정보부의 작전 책임자 콜린은 “나는 누구 한 사람도 억울하게 처형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피닉스 전략의 목적이나 효과는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콜린은 2년 후 미국 중앙정보부의 총책임자가 되었다.<ref name="매클리어463" /> 당시 사이공 정부의 추산에 따르면 피닉스 작전이 시작된 1968녀1968년 8월부터 1971년 중순에 으리기까지 그 진행과정에서 베트콩과 혐의가 있는 민간인 40,994명이 죽임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이들 희생자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는 전 CORDS(Civil Operations and Rural Development(sic) Support Program, 민간활동 및 농촌개발 지원계획) 책임자이며 그 후 CIA 국장을 역임했던 대학 교수인 윌리엄 E. 콜비(William E. Coby)는 의회의 한 위원회에서 “자신은 베트콩 하부조직에 대한 우리측 정보의 정확서에 대해 한번도 만족해 보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피닉스 작전 과정에서 레이드 의원이 그에게 제시한 1,000명이라는 수치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베트콩 하부조직으로 ‘잘못 확인되었을 것’이라고 시인했다.<ref>노엄 촘스키, 임채정 역, 《미국 대외정책론》, 일월서각, 1985년, ISBN 2005560001403, p.381</ref> 따라서 이 작전으로 인해 20,000명 내지는 40,00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미군과 한국군은 민간인 학살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미라이 학살]], [[하미 마을 학살 사건]], [[퐁니·퐁넛 양민 학살 사건]], [[빈호아 학살]] 등이 알려져 있으며 이 외에도 작전지역 내에서 수많은 학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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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전투]] 도중 남베트남 해방전선측에 의해 자행된 학살 사건으로서 확인된 민간인 희생자 수만 4,062명에 달하는 베트남전 중의 전쟁 범죄 중 가장 규모가 큰 학살 사건이다.
 
흔히 자유진영의 전쟁 범죄만 주목받곤 하나주목받지만, 후에 학살 등 월맹측에서 일으킨 전쟁범죄들 역시 다수 있었으며, 전쟁 기간 동안 월맹측에서는 이를 자유진영측의 전쟁범죄라전쟁범죄라고 규정하는 프로파간다를 해왔다. 전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는 이것들을 부정하거나 침묵으로 대응했으며, 학살 등 전쟁범죄들에 대한 참전국들의 공동조사 요청에 미온적으로 대응하는 이유로 꼽힌다.
 
그러나 [[노엄 촘스키]]를 비롯한 미국의 일부 진보적인 학자에 의해 반론이 제시되기도 했다. 후에 전투 당시의 상황과 미국과 사이공 정부측에서 제시한 문서들이 과장되고 각색되었으며, 또한 미국과 사이공 정부측의 근거로 제시한 2,748명의 명단이 처형한 사람의 명단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명단에서 즉시 처형되야할 대상으로 선정된 것은 후에 시의 비밀경찰 간부들뿐이었으며, 그 밖의 명단은 정확히 말하자면 ‘재교육’시켜야 할 명단이었고, 이후에 등장한 3,000명 4,000명 많게는 6,000명이라는 수치가 지극히 부풀려 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정보와 맥락의 편향성에서도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후에 전투 종결 이후 남베트남의 보복 학살과 전투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도시 80%가 파괴한 점에 대해선 언급되지 않으며, 폭격으로 사망한 이들에 대해선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문을 제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