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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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hong Nhi massacre 2.jpg|섬네일|퐁니·퐁넛 학살에 희생된 어린이]]
주베트남 미군 사령관 웨스트모어랜드는 베트남 전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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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즈번: 베트콩에 협조했다는 아무런 합리적 근거 없이 전원이 처형되었습니다.}}
이 청문회에서 미국 중앙정보부의 작전 책임자 콜린은 “나는 누구 한 사람도 억울하게 처형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피닉스 전략의 목적이나 효과는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콜린은 2년 후 미국 중앙정보부의 총책임자가 되었다.<ref name="매클리어463" /> 당시 사이공 정부의 추산에 따르면 피닉스 작전이 시작된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미군과 한국군은 민간인 학살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미라이 학살]], [[하미 마을 학살 사건]], [[퐁니·퐁넛 양민 학살 사건]], [[빈호아 학살]] 등이 알려져 있으며 이 외에도 작전지역 내에서 수많은 학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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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전투]] 도중 남베트남 해방전선측에 의해 자행된 학살 사건으로서 확인된 민간인 희생자 수만 4,062명에 달하는 베트남전 중의 전쟁 범죄 중 가장 규모가 큰 학살 사건이다.
흔히 자유진영의 전쟁 범죄만
그러나 [[노엄 촘스키]]를 비롯한 미국의 일부 진보적인 학자에 의해 반론이 제시되기도 했다. 후에 전투 당시의 상황과 미국과 사이공 정부측에서 제시한 문서들이 과장되고 각색되었으며, 또한 미국과 사이공 정부측의 근거로 제시한 2,748명의 명단이 처형한 사람의 명단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명단에서 즉시 처형되야할 대상으로 선정된 것은 후에 시의 비밀경찰 간부들뿐이었으며, 그 밖의 명단은 정확히 말하자면 ‘재교육’시켜야 할 명단이었고, 이후에 등장한 3,000명 4,000명 많게는 6,000명이라는 수치가 지극히 부풀려 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정보와 맥락의 편향성에서도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후에 전투 종결 이후 남베트남의 보복 학살과 전투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도시 80%가 파괴한 점에 대해선 언급되지 않으며, 폭격으로 사망한 이들에 대해선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문을 제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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