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폴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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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arco Polo, Il Milione, Chapter CXXIII and CXXIV.jpg|섬네일|200px|《[[동방견문록]]》의 한 페이지]]
 
《동방견문록》은 마르코 폴로가 여행한 지역의 방위와 거리, 주민의 언어, 종교, 산물, 동물과 식물 등을 하나씩 서술한 이야기 책의 성격을 갖고 있다. 마르코 폴로는 이 책의 작가가 아니며, 그와 함께 수감생활을 했던 이가 이야기를 듣고 펴낸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은 1인칭이 아니라 '마르코 폴로는..."와 같은 3인칭 형태로 서술되어 있다. 또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없던 시대이므로 최초 출간 이후에 여러 언어로 수많은 판본이 만들어져서 원본이 어떻게 변형되었는지 추적하기도 어렵다. 즉 마르코 폴로 본인이 언급한 내용과 타인이 덧붙인 내용이 어디인지 명확히 구분할 수는 없다.
《[[동방견문록]]》은 마르코 폴로 그가 여행한 지역의 방위와 거리, 주민의 언어, [[종교]], 산물, [[동물]]과 [[식물]] 등을 하나씩 기록한 [[탐사]] 보고서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심지어는 [[가마쿠라 막부|가마쿠라 바쿠후 시대]]([[일본]])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내용의 객관적인 진정성에 대한 비판도 있다. 예를 들면, [[원나라|원 제국 시대]](중국)의 문화인 [[한자]](漢字)와, [[차 (음료)|차]](茶)에 대한 언급도, [[중국의 역사|역사]] 및 [[중국의 철학|철학]]적으로도 뿌리깊은 악습인 [[전족]](纏足)에 대한 단 한줄의 비평도 없다<ref>하지만 이 가운데 한자나 전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당시 [[원나라|원]]에서는 한자 대신 오히려 [[몽골 문자]]가 공용 문자로 사용되었으며, 아무리 전족은 [[북송]] 때부터 있었다고 하지만, 오히려 [[명나라|명대]]에 이르러 성행하였다. 즉, [[원나라|원대]]의 [[몽골 제국|몽골]]에게 전족은 낯선 관습이었다.</ref>. 그리고 또한 [[아랍인|아라비안]] [[무슬림]]의 [[칼리프]]가 [[바그다드]]의 [[기독교인]]을 [[학살]]하려고 했다면서 [[이슬람교]]가 마치 다른 종교를 탄압한 종교인양 [[이슬람교]]의 [[무슬림]]을 몰지각의 극치라고 비판했다. [[가마쿠라 막부]]([[일본]])에 대한 언급도 “지팡구”는 황금으로 가득한 땅이라고 기술하였는데, 이는 당시 서구 상인들의 입맛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또한 당시 [[아랍인]]에게 황금향으로 알려진 나라는 지팡구가 아닌 “실라”(아마도 [[신라]])라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ref>무역 활동으로 제법 견문이 넓었던 [[아랍인]]들은 [[신라]]를 살기 좋은 곳으로 언급하는 기록을 남겼으며, 오히려 그들의 일부는 신라에 정착해서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처용설화]]의 [[처용]]을 오히려 아랍인으로 보는 설도 있다. 《우리역사의 수수께끼》1권/이덕일 외 공저/김영사.</ref> 즉, 동방견문록은 아무리 서구인들에게 동방에 대하여 자세하게 언급한 긍정적인 역할은 했지만, 객관성 없는 편견과 허구도 있다는 점에서 비평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동방견문록]]》의 객관성 없는 허구적인 면은 학자들로부터 마르코가 실제로는 동방을 여행한 적이 없으며, 동방견문록 또한 자신이 실제로 여행하고 겪은 일을 쓴 기행문이 아니라, 오히려 누군가로부터 들은 것이거나 자신이 객관성 없이 지어낸 것이라고 추정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특히 [[중화인민공화국]](중공)이 성립(成立)된 {{시작 날짜|1949|10|01}} 이후부터, 때 아닌 [[고고학|응용]] [[고고학]](應用 考古學)이 활행(活行)되면서,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써 《[[동방견문록]]》이 객관성 없는 허구라고 추정하고 있다.
 
내용의 진정성에 대한 의심도 있다. 예를 들면, 중국의 문화인 한자(漢字), 차(茶)에 대한 언급도, 전족(纏足)에 대한 비평도 없다는 게 이상하다는 것이다. 또한 칼리프가 바그다드의 기독교인을 학살하려고 했다면서 이슬람교가 마치 다른 종교를 탄압한 종교라고 비판했다.
# [[만리장성]](萬里長城)과, [[원나라]](중국)의 기술(공업 관련)이나 관습 등에 대한 언급이 없거나 미흡한 점.
# [[동방견문록]]에는 마르코가 [[쿠빌라이 칸]]을 알현했고, [[지원 (원 세조)|쿠빌라이 지원 황제의 조정]]의 칙사(勅使)를 지냈다고 하나 [[원나라]](중국)의 사서(史書)를 비롯한 문헌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
# 동방견문록에 언급되어 있는 마르코의 여행 경로는, 아무리 실크 로드([[비단길]])상으로도 실제 추적이 불가능하다는 점.
# 기행 중에 마르코 자기 자신의 감정이 전혀 서술되지 않았다는 점.
# 여행 중 마르코 폴로 본인에 대한 언급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 폴로 본인의 기행문이라고 보기엔 내용<ref>특히 대부분의 당시 [[원나라]]의 사회적 배경 등에 관련된 대목.</ref> 구성이 어색하다는 점.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 여행 자체는 분명한 사실이며, 이러한 의구점은 마르코 폴로가 일부 지역에 대해 자신의 바람과 더불어 입소문을 함께 사실로써 기록해 서술했기 때문이라고 반박한다. 중요한 객관성이 없어도 현재 학계에서 해당 내용은 여전히 많은 논란이 되고 있으나, 여전히 동방 여행에 대해서는 사실이라고 여기는 의견이 대다수이기도 하다.{{출처|날짜=2014-12-28}}
일본에 대한 언급을 문제 삼은 사람들이 있다. 동방견문록은 “지팡구”는 황금으로 가득한 땅이라고 기술하였다. 하지만 마르코 폴로는 이 책에서 본인이 일본에 직접 가서 본 것이 아니라 황제의 명을 받아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패배하고 돌아온 원나라 함대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라고 분명히 말한 바 있으므로, 일본의 황금에 대한 과장을 마르코 폴로의 책임이라 묻기는 어렵다. 한편 그는 원나라 함대가 태풍으로 인해 일본 원정에 실패하고 돌아온 과정을 상당히 상세하게 묘사했다.
 
동방견문록은 편견과 허구도 섞여있다는 점에서 비평을 받았다. 일부 호사가들은 마르코 폴로가 실제로는 동방을 여행한 적이 없으며, 누군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모았거나 스스로 지어낸 이야기라고 추정하기도 했다. 그런 의심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만리장성, 중국의 기술이나 관습 등에 대한 언급이 없거나 미흡한 점.(그러나 원나라 당시 만리장성은 중요한 구조물이 아니었다.)
# [[동방견문록]]에는동방견문록에는 마르코가 [[ 쿠빌라이 칸]]을칸을 알현했고, [[지원 (원 세조)|쿠빌라이 지원 황제의 조정]]의 칙사(勅使)를칙사를 지냈다고 하나 [[원나라]](중국)의 사서(史書)를 비롯한 문헌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
# 동방견문록에 언급되어 있는 마르코의 여행 경로는, 아무리 실크 로드([[비단길]])상으로도 실제 추적이 불가능하다는 점.(추적은 어려우나 경로 자체는 상세히 기술되어 있고 모두 실존한 도시들이다.)
#기행 중에 자기 자신의 감정이 전혀 서술되지 않았다는 점.(마르코 폴로는 수필 작가가 아니라 상인으로서 동방에 다녀온 것이므로 따로 감정을 서술할 이유는 없다.)
# 여행 중 마르코 폴로 본인에 대한 언급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서문에는 그와 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상세히 나온다.)
#본인의 기행문이라고 보기엔 내용 구성이 어색하다는 점.(실제로 본인이 쓴 기행문이 아니다. 이 점은 출간 당시부터 명확하게 밝혀져 있었다.)
 
이런 허술한 비판들은 거의 다 반박되어진 상태다. 현재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 여행 자체는 분명한 사실이며, 일부 과장된 부분들은 마르코 폴로가 일부 지역에 대해 자신의 바람이나 입소문을 함께 서술했거나 혹은 다 피사와 같은 타인에 의해서 내용에 덧붙여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마르코 폴로가 최소한 중국을 포함한 동방 지역을 여행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사실이라고 보는 의견이 대다수이다. 부정할 만한 명백한 근거가 나온 적도 없다.{{출처|날짜=2014-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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