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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공산당 상하이파는 일리아 박의 이항군대로 대표되고,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는 오하묵의 자유대대로 대표됐다. 우리나라의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되기 전에는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서울의 [[한성정부]], 상하이의 임시정부까지 총 3개가 있었다. 상하이파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지지했고, 이르쿠츠크파는 연해주 대한국민의회를 지지했다.{{efn|name=Babichev I}}{{efn|name=Pak B.D.1}}{{efn|name=Pak B.D.2}}{{efn|name=Pak B.D.3}}{{efn|name=Pak B.D.4}}{{efn|name= Sablin, Ivan}}
 
자유시는 [[극동 공화국|극동공화국]] 땅이었고, 자유대대는 극동공화국 소속 부대였기에 한인 무장 부대는 이르쿠츠크파의 자유대대에 편입이 되어야만 했다. 이때 상하이파 박일리아의 이항군대가 자유대대 편입을 거부하고 이를 극동공화국 한인부에 알렸다. 당시 극동공화국 한인부는 상하이파 인물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한국민의회나 자유대대와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박창은]], 그리고리예프를그리고 리예프를 파견하여 극동공화국과의 협의하에 주도권을 차지하려 하였다. 일리아 박의 이항군대를 사할린의용대(대한의용군)로 만들어 모든 한인 무장부대를 이 밑에 두려 했다.{{efn|name=Babichev I}}{{efn|name=Pak B.D.1}}{{efn|name=Pak B.D.2}}{{efn|name=Pak B.D.3}}{{efn|name=Pak B.D.4}}{{efn|name= Sablin, Ivan}}
 
하지만 1921년 2월 중순 자유시에 도착한 [[박창은]] 일행은 총사령관으로서의 지휘권을 행사하려 하다가 실패하고 총사령관직을 사임했고, 한인부는 그리고리예프를 연대장, 일리아 박를 군정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두 사람은 즉시 군대관리에 착수했다. 일리아 박은 자유대대에 편입되었던 이항군대와 다반군대를 마사노프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간도에서 온 독립군이 주축이던 대한독립군단도 자유시에서 강제로 내보냈다. 이때 자유대대는 끝까지 불응하여 장교들이 체포되었고, 이항군대와 다반군대에 의해 무장해제되었다. 자유대대는 극동공화국의 지방수비대로 격하되어 강제로 편입되었다. 이렇게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독립군 부대에 대한 통수권은 상해파와 [[일리아 박]]이 가지게 되었다.{{efn|name=Babichev I}}{{efn|name=Pak B.D.1}}{{efn|name=Pak B.D.2}}{{efn|name=Pak B.D.3}}{{efn|name=Pak B.D.4}}{{efn|name= Sablin, Ivan}}
자유시는 [[극동 공화국|극동공화국]] 땅이었고, 자유대대는 극동공화국 소속 부대였기에 한인 무장 부대는 이르쿠츠크파의 자유대대에 편입이 되어야만 했다. 이때 상하이파 박일리아의 이항군대가 자유대대 편입을 거부하고 이를 극동공화국 한인부에 알렸다. 당시 극동공화국 한인부는 상하이파 인물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한국민의회나 자유대대와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박창은]], 그리고리예프를 파견하여 극동공화국과의 협의하에 주도권을 차지하려 하였다. 일리아 박의 이항군대를 사할린의용대(대한의용군)로 만들어 모든 한인 무장부대를 이 밑에 두려 했다.{{efn|name=Babichev I}}{{efn|name=Pak B.D.1}}{{efn|name=Pak B.D.2}}{{efn|name=Pak B.D.3}}{{efn|name=Pak B.D.4}}{{efn|name= Sablin, Ivan}}
 
그러자 자유대대를 이끌었던 오하묵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이르쿠츠크에 있는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 동양비서부에 가서 한인무장부대의 통수권을 자기들이 가질 수 있도록 교섭했다. 코민테른은 극동공화국을 조종하고 있었기에 충분한 힘이 있었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이르쿠츠크파와 오하묵의 손을 들어주었다. 동양비서부는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네스토르 알렉산드로비치 칼란다리쉬빌리]], 부사령관에는 [[오하묵]], 군정위원으로는 [[김하석]], [[채성룡]]을채성룡을 임명하였다.<ref name="FCI" />
하지만 1921년 2월 중순 자유시에 도착한 [[박창은]] 일행은 총사령관으로서의 지휘권을 행사하려 하다가 실패하고 총사령관직을 사임했고, 한인부는 그리고리예프를 연대장, 일리아 박를 군정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두 사람은 즉시 군대관리에 착수했다. 일리아 박은 자유대대에 편입되었던 이항군대와 다반군대를 마사노프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간도에서 온 독립군이 주축이던 대한독립군단도 자유시에서 강제로 내보냈다.
 
이때 자유대대는 끝까지 불응하여 장교들이 체포되었고, 이항군대와 다반군대에 의해 무장해제되었다. 자유대대는 극동공화국의 지방수비대로 격하되어 강제로 편입되었다. 이렇게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독립군 부대에 대한 통수권은 상해파와 [[일리아 박]]이 가지게 되었다.{{efn|name=Babichev I}}{{efn|name=Pak B.D.1}}{{efn|name=Pak B.D.2}}{{efn|name=Pak B.D.3}}{{efn|name=Pak B.D.4}}{{efn|name= Sablin, Ivan}}
 
그러자 자유대대를 이끌었던 오하묵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이르쿠츠크에 있는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 동양비서부에 가서 한인무장부대의 통수권을 자기들이 가질 수 있도록 교섭했다. 코민테른은 극동공화국을 조종하고 있었기에 충분한 힘이 있었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이르쿠츠크파와 오하묵의 손을 들어주었다. 동양비서부는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네스토르 알렉산드로비치 칼란다리쉬빌리]], 부사령관에는 [[오하묵]], 군정위원으로는 [[김하석]], [[채성룡]]을 임명하였다.<ref name=FCI/>
 
1921년 6월 2일 소련적군은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는데, 이는 우리 독립군이 소련 공산당을 위하여 싸워달라는 요구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소련 공산당을 위해 싸우라는 요구에 독립군은 항의하였으나 그들은 이미 독립군을 2중-3중으로 포위하여 무조건 수락을 강요하고 있었다.{{efn|name=Babichev I}}{{efn|name=Pak B.D.1}}{{efn|name=Pak B.D.2}}{{efn|name=Pak B.D.3}}{{efn|name=Pak B.D.4}}{{efn|name= Sablin, Iv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