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우언라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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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년 ====
1970년대에는 [[문화대혁명]]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던 중 미중 정상회담에 응하기도 했지만, 미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교는 그의 임기에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미국의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1971년 8월 비밀리에 베이징을 방문해서 저우언라이와 회담을 가졌고, 그 결과 1972년 2월21일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 간의 미․중 정상회담이 이루어졌다.<ref>{{서적 인용 |저자=박승준 |제목=한국과 중국 100년 |연도= 2010|출판사=기파랑 |위치=서울 |ISBN=978-89-91965-12-6 |쪽= 17|인용문 = 1971년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의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Henry A. Kissinger)가 1971년 8월 비밀리에 베이징을 방문해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와 회담을 가졌고, 그 결과 1972년 2월 21일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 간의 미․중 정상회담이 이뤄진 이후에는 점차로 외교적 기반을 상실해갔다.}}</ref> 저우언라이 자신도 미․중 정상회담에 마오쩌둥과 함께 미국 측의 주된 상대로 나서 [[상하이 코뮤니케]]에코뮤니케에 공동서명하였다공동서명을 하였다.
 
그는 말년에 자신에게 [[방광암]]이 발병한 것을 알고, [[덩샤오핑]]에게 많은 직무를 넘겨주기 시작했다. 1974년 문화대혁명이 끝나갈 무렵에는 저우 자신이 마오와 [[사인방]]에 단지 협조하면서 권력에 순응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총리직 사퇴를 만류하는 주변의 요청에 따라 정계에서 은퇴하지 않았고 [[사인방]] 체제 하에서 문혁 내내 계속 정무를 맡아보았다. 1976년 1월 마오에 8개월 앞서 사망했다. 향년 79세. 장례식에서 추도사는 덩샤오핑이 읽었으며, 그의 유해는 화장 정책을 추진하던 중국 정부의 뜻답게, 자신의 유언대로 화장되어 중국에 뿌려졌다. 저우는 마오 정권 내내 2인자로서 [[마오쩌둥]]을 보필하였으나, 일설에는 마오가 저우가 자신보다 장수할 것을 우려해 병치료를 방해했다는 설이 있다. 텐진에는 이후 저우와 그의 부인 덩잉차오를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