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깨진 각주 정리
편집 요약 없음
태그: 시각 편집 m 모바일 웹
202번째 줄:
[[1937년]] [[7월 7일]], 루거우 다리 사건을 빌미로 선전포고도 없이 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은 근대화된 산업력에 바탕을 둔 잘 훈련된 30만 명 이상의 정규군과 일본군 장교에 의해 지휘되는 [[만주국]] 출신 만주인 및 내몽골인 부대 최소 15만 명, 그리고 약 200만 명에 가까운 예비군과 당시 세계 3위의 강력한 해군력과 육군 항공대와 해군 항공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 중국 국민당은 숫적으로는 4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는 병력이 있었으나, 현대식 무기로 제대로 된 무장을 갖춘 부대는 약 30여만30만 명인 [[장제스]]의 직속부대뿐이었다. 나머지는 지방 군벌들 세력이 주축이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부패하고 무능했으며 변변한 장비조차 갖추지도 못하였다.
 
해군 역시 일본군의 총 배수량이 100만톤에 달하는 반면 중국군은 6만톤정도밖에60,000톤 정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 6만톤60,000톤 역시 대부분이 구식함정이나 소규모 구축함, 어뢰정이었고 그나마 신식 함정도 1932년 일본 조선소에서 건조한 2천 5백톤급2,500톤급 경순양함 닝하이와 이 닝하이를 본 떠 자국에서 건조한 핑하이 등 수 척밖에 없었다. 또한 일본해군이 수십대를 가지고 있던 잠수함과 항공모함 또한 없었다. 그나마 전쟁 직전 해군참모총장 [[천샤오콴]]의천샤오콴의 요청으로 독일에서 잠수함 수 대를 주문했으나 이 역시 [[아돌프 히틀러]]가 대중 무기 금수조치를 내려 인도받지 못하였다.
 
공군의 질은 그나마 일본군과 비등해 [[상하이 전투]]에서 일본군 항공기 수 대를 격추하는 등 선전했으나 역시 파일럿들의 훈련도가 일본군에 비해 심하게 떨어져 큰 전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210번째 줄:
전쟁 초기에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승승장구했다. [[7월 28일]] 중국 29군에 대해 총공격을 개시했고, [[7월 30일]]에는 [[베이징]], [[톈진]]을 점령했다. 중화민국 정부군은 화북지역에 '장제스 라인'이라고 불리던 방어선을 구축했는데, 제 1방어선은 [[바오딩]]-칭 현, 제 2방어선은 안양 현-[[지난]]을 따라 구축되었다. 이 지역엔 수많은 토치카와 방어진지가 세워졌다.
 
장제스는 [[8월 7일]] 국방회의에서 전면항전을 결의시켰고, 12일에는 육해공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8월 9일]], 일본군 장교와 병사가 중국군 관할 하의 [[상하이 홍커우 공항]]에공항에 난입하다가 사살당한 사건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상하이에서도 양 국간의 긴장이 격화되고, 결국 [[8월 13일]] 상하이의 조계지를 경비하던 [[일본군]] 해군 특별육전대가 상하이의 중국 관할구역을 선제공격하고 이어 23일에는 2개 사단이 상륙하는 등 화중에서도 전투가 시작된다.
 
이와 동시에 9월부터는 일본군이 화북 지방에서 남진을 개시하기 시작한다. 일본군의 화북 지역 공격은 비교적 순조로운 편이었으나, [[산서성]] 지역에서는 강한 저항을 받았다. 9월에 [[린뱌오]]가 이끄는 팔로군 115사단과 [[허룽 (1896년)|허룽]]이 지휘하는 120사단이 [[평형관]]에서평형관에서 일본군을 매복공격해 2개 중대를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동시에 국민당군 역시 평형관에 방어진지를 차리고 일본군이 격렬하게 저항했다. 평형관 전투는 팔로군이 대일본전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였고, [[중국공산당]]은 이 승리를 크게 선전했다. [[9월 22일]] 공산당이 '정성단결 일치항적 선언'을 발표하고 그 다음날인 23일 장제스가 이 선언을 받아들이는 담화를 발표함으로써 [[제2차 국공합작]]이 완성되었다.
 
10월에는 신커우전에서 [[웨이리황]](衛立煌)의 지휘 아래 중앙군과 산서군이 [[일본군]] 제5사단에 맞서 격렬한 전투를 전개했다. 일본군의 선발대로 출격한 12여단은 신커우전의 중국군 포위망에 걸려 수천의 사상자를 냈다. 이 전투는 [[화북]]에서 치러진 초기의 전투 가운데 가장 격렬한 것이었다. 이때 [[팔로군]]도 유격부대로 나서서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비행장을 파괴함으로써 국공 양군의 협력이 이루어졌다. 이 전투로 일본군의 화북 지역 점령은 지지부진해졌고, 진격은 1개월 정도 지연됐다.
 
하지만 장제스가 산시성을 공격하는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해 증원을 저지하라고 명령한 산둥성장 [[한푸쥐]]는한푸쥐는 장제스의 명령을 무시하고 적전도주했고, 이에 일본군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10월 말 중국군 측면의 냥쯔관을 2개 사단으로 공격해 장악한다. 이때까지 신커우전을 잘 방어하고 있던 중국군은 측면을 위협받게 되었고, 결국 11월 초 옌시산은 신커우전을 포기하고 총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일본군은 양면에서 산시성의 성도 [[타이위안]]을 협격했고 결국 11월 12일 타이위안은 일본군한테 함락된다. 한푸쥐는 이후 산둥성 방어전에서도 장제스의 명령을 무시하고 비행기로 혼자 적전도주해 결국 1938년 1월 분노한 장제스에 의해 총살된다.
 
옌시산은 그의 잔존군대와 산시성 남부의 린펀으로 후퇴했고, 이곳은 산지인 만큼 일본군은 쉽게 추격하지 못했다. 하지만 1938년 3월 일본군은 결국 이곳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했고, 옌시산은 장제스 몰래 일본군 지휘관과 싸우지 않기로 협정을 맺었다. 이후 산시성 남부 산악지대의 산을 중심으로 양군간의 전투는 소강상태에 이르렀고, 오히려 옌안에서부터 확장하기 시작한 중국 공산당이 옌시산의 영지를 잠식하자 산시군-팔로군 간의 전투가 더욱 많이 벌어졌다.
227번째 줄:
[[파일:Japanese artillery soldiers with gas masks, Changsha, 1941.jpg|섬네일|200픽셀|1941년 [[창사]] 전투에서 [[일본 제국 육군]]]]
 
전쟁 초기 파죽지세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 수뇌부들은 '2~3개월 정도면 중국대륙 전역을 점령해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고 8월에 [[상하이]]에 상륙해 공략을 시작했는데, 상하이에서의 중국군의 저항은 매우 격렬했다. 특히 [[오송 상륙 전투]]에서전투에서 일본군은 매우 큰 피해를 입었다. 이는 1930년대 초 [[중독합작|중국 주재 독일 군사고문]]으로 파견된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팔켄하우젠]] 장군과 [[한스 폰 젝트]] 장군이 강력한 벙커밭을 조성하였고, [[장제스]]의 직속군대 역시 독일식 장비를 갖추고 독일 군사고문의 조언대로 훈련 받으면서 육성되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이러한 벙커밭을 뚫기 위해 돌진하는 과정에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ref>상하이 전투를 '우쑹 크리크 공방전' 이라고 한다. '우쑹 크리크'라는 수로를 놓고 2만명의 [[일본군]]이 돌격을 했는데 일본군 상부는 '화기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총검만 쓸 것'을 명령했다. 또한 중국군을 얕보고 탄약도 1인당 200발 밖에 지급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 우쑹 크리크 지역에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전을 제대로 경험해 본 중국주재 독일 군사고문관인 팔켄하우젠의 지시로 지어진 독일식 콘크리트 진지, 각종 유럽제 중화기, 빽빽한 [[지뢰]]밭이 촘촘히 배치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일본군은 1시간 만에 1만명이 전사하고, 3주만에 전체 병력의 96%가 손실되는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ref> 또한 독일식으로 훈련받은 장제스의 직속군대의 정예 제88사단은 일본군의 지원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일본군 상륙부대를 상하이에 묶어 놓고, 매우 격렬하게 저항했다.
 
일본군은 하루에 수백미터, 어떤 날에는 수십미터 밖에 전진하지 못했지만 자폭 특공대 등을 활용해 간신히 조금씩 전진해 중국군 방어진지인 뤄뎬전, 다창전 등에 공세를 가했다. 하지만 이렇게 해도 방어선이 뚫리지 않자 간인노미야 친왕의 허가 아래 1926년 이래 사용이 금지된 독가스까지 사용했다. 중국군 역시 병력이 남는대로 상하이로 보냈고 화북으로 보낼 지원군도 상하이로 차출해 보내, 80만이라는 대병력이 상하이에 집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