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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전쟁 지원 약속 ====
1950년 1월 17일 [[박헌영]]의 관저에서 열린 만찬에서 [[김일성]]은 북한 주재 소련 대사 [[스티코프]]에게 남침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이를 논의하기 위하여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과의 면담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이 대화에서 김일성은 [[중국 공산당]]이 [[중화민국]]을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성립한 것을 계기로 고무되어 [[대한민국]]이 차지한 남한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강조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기강이 세워진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김일성은 이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대한민국|남한]]의 선제공격에 대한 반격만을 승인한 1949년 3월의 [[스탈린]]의 결정에 불만을 토로했다.<ref>김영호,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과정》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006) 138쪽. <!-- “이 대화에서 김일성은 중국혁명이 성공한 다음에는 남한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강조하고 북한은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김일성은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남한의 선제공격에 대한 반격만을 승인한 1949년 3월 스탈린의 결정에 불만을 토로했다.”--></ref><ref name="stalin_accept">[http://mn.kbs.co.kr/news/view.do?ncd=2118018 소련, “남침 준비 부족, 게릴라전 주력하라”], [[KBS]] 2010.06.24 (22:03)</ref><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200289104006&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2&officeId=00028&pageNo=4&printNo=1960&publishType=00010 |제목 =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2> |출판사 =한겨레신문 |날짜 = 1994-07-22 |쪽 = 5 |인용문 = <!-- ◇ 김일성의 통일전쟁 제의 △ 1950년 1월 19일=슈티코프 대사는 1월 17일 박헌영 관저에서 열린 리셉션에서 북한 지도부와의 대화내용을 소련 외무성에 보고. 이 리셉션에서 김일성은 “인민의 열망을 저버리지 않아야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밤에 잠이 안 온다”면서 “통일이 늦어지면 남한 인민은 대단히 실망할 것”이라고 언급. 북한쪽은 49년 3월 스탈린이 남한의 공격에 대한 반격만을 승인했지만 이승만이 공격을 늦추고 있어 반격 시행의 기회가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현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김일성이 스탈린과의 면담을 희망. 소련 외교관들이 이에 관해 대화를 회피하자 김일성은 슈티코프에게 자산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재차 반복. “스탈린과 만나 남조선의 상황과 남진공격 문제를 토의하고 싶다. 이번에 만날 수가 없으면 마오쩌둥이 모스크바에서 모든 문제에 관해 지시를 받아올 것이므로 모스크바에서 돌아올 때 그와 만나겠다. 왜 나의 옹진작전을 허락안해주는가. 총공격으로 넘어가면 며칠후에는 서울에 들어갈 수 있다. 스탈린의 조언을 듣고 싶다.”-->}}</ref> 1월 30일, 스탈린이 서명한 전보를 평양으로 타전했다. 전문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가 되나 '큰일'에 관해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지나친 모험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접견해 이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돼 있으며 그를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200289104006&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2&officeId=00028&pageNo=4&printNo=1960&publishType=00010 |제목 =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2> |출판사 =한겨레신문 |날짜 = 1994-07-22 |쪽 = 5 |인용문 = <!-- ◇ 스탈린의 개전 동의... △1.30 = 스탈린이 서명한 전보를 평양으로 타전. 전문에는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가 되나 '큰일'에 관해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지나친 모험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됨. 스탈린은 김일성을 접견해 이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돼 있으며 그를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힘. -->}}</ref> 3월 20일, 김일성은 스티코프와의 면담에서 4월 초에 자신과 박헌영이 스탈린과 만나고자 한다는 것을 전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김일성은 이번 방문을 46년의 방문처럼 비공식(비밀)으로 할 것을 제의하였다. 김일성은 남북한 통일의 방법, 북한 경제개발의 전망, 기타 공산당내 문제에 관해 스탈린과 협의하기를 원하였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200289104006&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2&officeId=00028&pageNo=4&printNo=1960&publishType=00010 |제목 =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2> |출판사 =한겨레신문 |날짜 = 1994-07-22 |쪽 = 5 |인용문 = <!-- ◇ 김일성-스탈린 회담 △ 3.20 = 김일성은 슈티코프와의 면담에서 4월 초에 자신과 박헌영이 스탈린과 만나고자 한다는 것을 전해달라고 요청. 김일성은 이번 방문을 46년의 방문처럼 비공식(비밀)으로 할 것을 제의. 김일성은 남북한 통일의 방법, 북한 경제개발의 전망, 기타 공산당내 문제에 관해 스탈린과 협의하기를 원함.-->}}</ref> 4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과 김일성 간의 회담에서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북한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 데 동의하였다. 다만,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중화인민공화국과 북한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중국 공산당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200289104006&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2&officeId=00028&pageNo=4&printNo=1960&publishType=00010 |제목 =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2> |출판사 =한겨레신문 |날짜 = 1994-07-22 |쪽 = 5 |인용문 = <!-- ◇ 김일성-스탈린 회담 △ 4.? = 모스크바 회담에서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북한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 데 동의,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중국과 북한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중국쪽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 -->}}</ref>
 
김일성은 남북한 통일의 방법, 북한 경제개발의 전망, 기타 공산당내 문제에 관해 스탈린과 협의하기를 원하였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200289104006&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2&officeId=00028&pageNo=4&printNo=1960&publishType=00010 |제목 =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2> |출판사 =한겨레신문 |날짜 = 1994-07-22 |쪽 = 5 |인용문 = <!-- ◇ 김일성-스탈린 회담 △ 3.20 = 김일성은 슈티코프와의 면담에서 4월 초에 자신과 박헌영이 스탈린과 만나고자 한다는 것을 전해달라고 요청. 김일성은 이번 방문을 46년의 방문처럼 비공식(비밀)으로 할 것을 제의. 김일성은 남북한 통일의 방법, 북한 경제개발의 전망, 기타 공산당내 문제에 관해 스탈린과 협의하기를 원함.-->}}</ref> 4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과 김일성 간의 회담에서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북한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 데 동의하였다. 다만,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중화인민공화국과 북한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중국 공산당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200289104006&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2&officeId=00028&pageNo=4&printNo=1960&publishType=00010 |제목 =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2> |출판사 =한겨레신문 |날짜 = 1994-07-22 |쪽 = 5 |인용문 = <!-- ◇ 김일성-스탈린 회담 △ 4.? = 모스크바 회담에서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북한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 데 동의,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중국과 북한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중국쪽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 -->}}</ref>
5월 12일, [[스티코프]]가 김일성 및 박헌영과 면담한 자리에서 김일성은 [[마오쩌둥]]과의 면담계획을 밝혔다. “소련에서 돌아온 후 [[이두연]] 주베이징대사로부터 마오쩌둥과의 면담 결과를 보고받았다. 마오는 ‘[[남북통일|조선통일]]은 무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미국이 남한 같은 작은 나라 때문에 3차대전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마오와 면담하기 위해 5월 13일 베이징으로 출발할 것이다. 마오는 내가 대남 군사행동을 곧 시작할 생각이라면 비공식으로 만나겠다고 한다. 마오에게 북한으로 이양되는 중공군 소속의 조선인 사단을 위해 중국이 노획한 일본 및 미국무기를 제공해줄 것을 요청할 계획이다. 50년 6월께로 예정하고 있는 남침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하라는 지시를 북한군 총참모장에게 시달했다. 작전이 6월에 개시될 것이나 그때까지 준비가 완료될지 자신이 없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200289104006&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2&officeId=00028&pageNo=4&printNo=1960&publishType=00010 |제목 =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2> |출판사 =한겨레신문 |날짜 = 1994-07-22 |쪽 = 5 |인용문 = <!-- ◇ 김일성-스탈린 회담 △ 5.12=슈티코프가 김일성 및 박헌영과 면담한 자리에서 김일성은 마오쩌둥과의 면담계획을 밝힘. “소련에서 돌아온 후 이두연 주베이징대사로부터 마오쩌둥과의 면담 결과를 보고받았다. 마오는 ‘조선통일은 무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미국이 남한 같은 작은 나라 때문에 3차 대전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마오와 면담하기 위해 5월 13일 베이징으로 출발할 것이다. 마오는 내가 대남 군사행동을 곧 시작할 생각이라면 비공식으로 만나겠다고 한다. 50년 6월께로 예정하고 있는 남침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하라는 지시를 북한군 총참모장에게 시달했다. 작전이 6월에 개시될 것이나 그때까지 준비가 완료될지 자신이 없다.” -->}}</ref> 5월 13일, 김일성과 박헌영이 베이징에 도착하여 마오쩌둥과 면담하고 [[스탈린]]이 모스크바 회담 때 ‘현 국제환경은 과거와는 다르므로 북한이 행동을 개시할 수 있으나 최종결정은 마오쩌둥과의 협의를 통해 이뤄야한다’고 했음을 설명했다. 5월 14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에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국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동지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고 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300289104008&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3&officeId=00028&pageNo=4&printNo=1961&publishType=00010 |제목 =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3> |출판사 =한겨레신문 |날짜 = 1994-07-23 |쪽 = 5 |인용문 = <!-- ◇ 김일성-마오쩌둥 회담 △ 50.5.13= 김일성과 박헌영 베이징에 도착, 마오쩌둥과 면담하고 필리포프(스탈린) 동무가 모스크바 회담 때 ‘현 국제환경은 과거와는 다르므로 북한이 행동을 개시할 수 있으나 최종결정은 마오쩌둥과의 협의를 통해 이뤄야한다’고 했음을 설명. △5.14=스탈린이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국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如果中国同志不同意,则应重新讨论解决这个问题” 김동길의 논문에선 중국의 동지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응당 재차 논의해서 이 문제를 결정해야한다고 하였다. 논란의 소지가 있는 구절이다 자세한 것은, “三国同谋论”分析:朝鲜战争起源的再思考이라는 글을 참조, 이 글은 www.aisixiang.com, www.21ccom.net 등 중국 논문 사이트에 게재되어있다.)-->}}</ref> 5월 15일, 모스크바의 메시지를 받은 뒤 마오는 김일성 · 박헌영과 구체적으로 의견을 교환하였다. 김일성은 북한이 ‘군사력 증강-평화통일 대남제의-대 한민국쪽의 평화통일 제의 거부 뒤 전투행위 개시’의 3단계 계획을 세웠다고 언급했다. 마오가 이 계획에 찬성을 표명하고 일본군의 개입 가능성을 물은 데 대해 김일성은 일본군이 참전할 가능성은 별로 없는 것으로 보나 미국이 2만~3만명의 일본군을 파견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참전이 상황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오는 만일 미군이 참전한다면 중국은 병력을 파견해 북한을 돕겠다고 했다. 소련은 미국쪽과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가 있기 때문에 전투행위에 참가하기가 불편하지만 중국은 이런 의무가 없으므로 북한을 도와줄 수 있다고 했다. 북한이 현 시점에서 작전 개시를 결정함으로써 이 작전이 양국간 공동의 과제가 되었으므로 이에 동의하고 필요한 협력을 제공하겠다고 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300289104008&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3&officeId=00028&pageNo=4&printNo=1961&publishType=00010 |제목 =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3> |출판사 =한겨레신문 |날짜 = 1994-07-23 |쪽 = 5 |인용문 = <!-- ◇ 김일성-마오쩌둥 회담 △ 5.15=모스크바의 메시지를 받은 뒤 마오는 김일성․박헌영과 구체적으로 의견을 교환. 김일성은 북한이 ‘군사력 증강-평화통일 대남제의-남한쪽의 평화통일 제의 거부 뒤 전투행위 개시’의 3단계 계획을 세웠다고 언급. 마오가 이 계획에 찬성을 표명하고 일본군의 개입 가능성을 물은 데 대해 김일성은 일본군이 참전할 가능성은 별로 없는 것으로 보나 미국이 2만~3만명의 일본군을 파견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고 답변. 그러나 일본군의 참전이 상황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함. 마오는 만일 미군이 참전한다면 중국은 병력을 파견해 북한을 돕겠다고 함. 소련은 미국쪽과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가 있기 때문에 전투행위에 참가하기가 불편하지만 중국은 이런 의무가 없으므로 북한을 도와줄 수 있다고 함. 북한이 현 시점에서 작전 개시를 결정함으로써 이 작전이 양국간 공동의 과제가 되었으므로 이에 동의하고 필요한 협력을 제공하겠다고 함.”-->}}</ref> 5월 29일, 김일성은 [[스티코프]]에게 4월 모스크바 회담시 합의된 무기와 기술이 이미 대부분 북한에 도착했음을 통보하였다. 이 통보에서, 또한, 김일성은 새로 창설된 사단들이 6월말까지 준비 완료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북한군 참모장이 [[바실리예프]] 장군과 함께 마련한 남침공격 계획을 북한지도부가 승인하였고, 군조직 문제는 6월 1일까지 끝내기로 했다. 북한 군은 6월까지 완전한 전투준비 태세를 갖추게 된다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6월말 이후는 북한군의 전투준비에 관한 정보가 남쪽에 입수될 수 있으며 7월에는 장마가 시작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6월 8~10일께 집결지역으로의 병력이동을 시작할 것이이라고 보고되었으며, 김일성과 면담 뒤 스티코프는시발이라 하며 바실리예프 장군 및 [[포스트니코프]] 장군과 의견을 교환했다. 그들은 7월에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시의적절하나 일기관계로 6월로 변경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300289104008&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3&officeId=00028&pageNo=4&printNo=1961&publishType=00010 |제목 =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3> |출판사 =한겨레신문 |날짜 = 1994-07-23 |쪽 = 5 |인용문 = <!-- ◇ 대남 공격계획 수립 △ 5.29=김일성은 슈티코프에게 4월 모스크바회담시 합의된 무기와 기술이 이미 대부분 북한에 도착했음을 통보. 김일성은 새로 창설된 사단들이 6월말까지 준비 완료될 것이라고 말함.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북한군 참모장이 바실리예프 장군과 함께 마련한 남침공격 계획을 북한지도부가 승인. 군조직 문제는 6월 1일까지 끝내기로 함. 북한군은 6월까지 완전한 전투준비 태세를 갖추게 됨. 김일성은 6월말 이후는 북한군의 전투준비에 관한 정보가 남쪽에 입수될 수 있으며 7월에는 장마가 시작된다는 점을 지적. 6월8~10일께 집결지역으로의 병력이동을 시작할 것임. 김일성과 면담 뒤 슈티코프는 바실리예프 장군 및 포스트니코프 장군과 의견을 교환. 그들은 7월에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시의적절하나 일기관계로 6월로 변경할 수 밖에 없다고 함.”-->}}</ref> 6월 11일, 대한민국은 통일민주조국전선이 제의한 평화통일안을 거부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300289104008&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3&officeId=00028&pageNo=4&printNo=1961&publishType=00010 |제목 =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3> |출판사 =한겨레신문 |날짜 = 1994-07-23 |쪽 = 5 |인용문 = <!-- ◇ 김일성-마오쩌둥 회담 △ 6.11=남한은 통일민주조국전선이 제의한 평화통일안을 거부.”-->}}</ref>
 
5월 12일, [[스티코프]]가 김일성 및 박헌영과 면담한 자리에서 김일성은 [[마오쩌둥]]과의 면담계획을 밝혔다. “소련에서 돌아온 후 이두연 주베이징대사로부터 마오쩌둥과의 면담 결과를 보고받았다. 마오는 ‘[[남북통일|조선통일]]은 무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미국이 남한 같은 작은 나라 때문에 3차대전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마오와 면담하기 위해 5월 13일 베이징으로 출발할 것이다. 마오는 내가 대남 군사행동을 곧 시작할 생각이라면 비공식으로 만나겠다고 한다. 마오에게 북한으로 이양되는 중공군 소속의 조선인 사단을 위해 중국이 노획한 일본 및 미국무기를 제공해줄 것을 요청할 계획이다. 1950년 6월께로 예정하고 있는 남침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하라는 지시를 북한군 총참모장에게 시달했다. 작전이 6월에 개시될 것이나 그때까지 준비가 완료될지 자신이 없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200289104006&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2&officeId=00028&pageNo=4&printNo=1960&publishType=00010 |제목 =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2> |출판사 =한겨레신문 |날짜 = 1994-07-22 |쪽 = 5 |인용문 = <!-- ◇ 김일성-스탈린 회담 △ 5.12=슈티코프가 김일성 및 박헌영과 면담한 자리에서 김일성은 마오쩌둥과의 면담계획을 밝힘. “소련에서 돌아온 후 이두연 주베이징대사로부터 마오쩌둥과의 면담 결과를 보고받았다. 마오는 ‘조선통일은 무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미국이 남한 같은 작은 나라 때문에 3차 대전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마오와 면담하기 위해 5월 13일 베이징으로 출발할 것이다. 마오는 내가 대남 군사행동을 곧 시작할 생각이라면 비공식으로 만나겠다고 한다. 50년 6월께로 예정하고 있는 남침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하라는 지시를 북한군 총참모장에게 시달했다. 작전이 6월에 개시될 것이나 그때까지 준비가 완료될지 자신이 없다.” -->}}</ref> 5월 13일, 김일성과 박헌영이 베이징에 도착하여 마오쩌둥과 면담하고 [[스탈린]]이 모스크바 회담 때 ‘현 국제환경은 과거와는 다르므로 북한이 행동을 개시할 수 있으나 최종결정은 마오쩌둥과의 협의를 통해 이뤄야한다’고 했음을 설명했다. 5월 14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에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5월 12일, [[스티코프]]가 김일성 및 박헌영과 면담한 자리에서 김일성은 [[마오쩌둥]]과의 면담계획을 밝혔다. “소련에서 돌아온 후 [[이두연]] 주베이징대사로부터 마오쩌둥과의 면담 결과를 보고받았다. 마오는 ‘[[남북통일|조선통일]]은 무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미국이 남한 같은 작은 나라 때문에 3차대전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마오와 면담하기 위해 5월 13일 베이징으로 출발할 것이다. 마오는 내가 대남 군사행동을 곧 시작할 생각이라면 비공식으로 만나겠다고 한다. 마오에게 북한으로 이양되는 중공군 소속의 조선인 사단을 위해 중국이 노획한 일본 및 미국무기를 제공해줄 것을 요청할 계획이다. 50년 6월께로 예정하고 있는 남침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하라는 지시를 북한군 총참모장에게 시달했다. 작전이 6월에 개시될 것이나 그때까지 준비가 완료될지 자신이 없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200289104006&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2&officeId=00028&pageNo=4&printNo=1960&publishType=00010 |제목 =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2> |출판사 =한겨레신문 |날짜 = 1994-07-22 |쪽 = 5 |인용문 = <!-- ◇ 김일성-스탈린 회담 △ 5.12=슈티코프가 김일성 및 박헌영과 면담한 자리에서 김일성은 마오쩌둥과의 면담계획을 밝힘. “소련에서 돌아온 후 이두연 주베이징대사로부터 마오쩌둥과의 면담 결과를 보고받았다. 마오는 ‘조선통일은 무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미국이 남한 같은 작은 나라 때문에 3차 대전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마오와 면담하기 위해 5월 13일 베이징으로 출발할 것이다. 마오는 내가 대남 군사행동을 곧 시작할 생각이라면 비공식으로 만나겠다고 한다. 50년 6월께로 예정하고 있는 남침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하라는 지시를 북한군 총참모장에게 시달했다. 작전이 6월에 개시될 것이나 그때까지 준비가 완료될지 자신이 없다.” -->}}</ref> 5월 13일, 김일성과 박헌영이 베이징에 도착하여 마오쩌둥과 면담하고 [[스탈린]]이 모스크바 회담 때 ‘현 국제환경은 과거와는 다르므로 북한이 행동을 개시할 수 있으나 최종결정은 마오쩌둥과의 협의를 통해 이뤄야한다’고 했음을 설명했다. 5월 14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에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국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동지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고 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300289104008&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3&officeId=00028&pageNo=4&printNo=1961&publishType=00010 |제목 =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3> |출판사 =한겨레신문 |날짜 = 1994-07-23 |쪽 = 5 |인용문 = <!-- ◇ 김일성-마오쩌둥 회담 △ 50.5.13= 김일성과 박헌영 베이징에 도착, 마오쩌둥과 면담하고 필리포프(스탈린) 동무가 모스크바 회담 때 ‘현 국제환경은 과거와는 다르므로 북한이 행동을 개시할 수 있으나 최종결정은 마오쩌둥과의 협의를 통해 이뤄야한다’고 했음을 설명. △5.14=스탈린이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국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如果中国同志不同意,则应重新讨论解决这个问题” 김동길의 논문에선 중국의 동지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응당 재차 논의해서 이 문제를 결정해야한다고 하였다. 논란의 소지가 있는 구절이다 자세한 것은, “三国同谋论”分析:朝鲜战争起源的再思考이라는 글을 참조, 이 글은 www.aisixiang.com, www.21ccom.net 등 중국 논문 사이트에 게재되어있다.)-->}}</ref> 5월 15일, 모스크바의 메시지를 받은 뒤 마오는 김일성 · 박헌영과 구체적으로 의견을 교환하였다. 김일성은 북한이 ‘군사력 증강-평화통일 대남제의-대 한민국쪽의 평화통일 제의 거부 뒤 전투행위 개시’의 3단계 계획을 세웠다고 언급했다. 마오가 이 계획에 찬성을 표명하고 일본군의 개입 가능성을 물은 데 대해 김일성은 일본군이 참전할 가능성은 별로 없는 것으로 보나 미국이 2만~3만명의 일본군을 파견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참전이 상황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오는 만일 미군이 참전한다면 중국은 병력을 파견해 북한을 돕겠다고 했다. 소련은 미국쪽과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가 있기 때문에 전투행위에 참가하기가 불편하지만 중국은 이런 의무가 없으므로 북한을 도와줄 수 있다고 했다. 북한이 현 시점에서 작전 개시를 결정함으로써 이 작전이 양국간 공동의 과제가 되었으므로 이에 동의하고 필요한 협력을 제공하겠다고 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300289104008&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3&officeId=00028&pageNo=4&printNo=1961&publishType=00010 |제목 =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3> |출판사 =한겨레신문 |날짜 = 1994-07-23 |쪽 = 5 |인용문 = <!-- ◇ 김일성-마오쩌둥 회담 △ 5.15=모스크바의 메시지를 받은 뒤 마오는 김일성․박헌영과 구체적으로 의견을 교환. 김일성은 북한이 ‘군사력 증강-평화통일 대남제의-남한쪽의 평화통일 제의 거부 뒤 전투행위 개시’의 3단계 계획을 세웠다고 언급. 마오가 이 계획에 찬성을 표명하고 일본군의 개입 가능성을 물은 데 대해 김일성은 일본군이 참전할 가능성은 별로 없는 것으로 보나 미국이 2만~3만명의 일본군을 파견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고 답변. 그러나 일본군의 참전이 상황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함. 마오는 만일 미군이 참전한다면 중국은 병력을 파견해 북한을 돕겠다고 함. 소련은 미국쪽과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가 있기 때문에 전투행위에 참가하기가 불편하지만 중국은 이런 의무가 없으므로 북한을 도와줄 수 있다고 함. 북한이 현 시점에서 작전 개시를 결정함으로써 이 작전이 양국간 공동의 과제가 되었으므로 이에 동의하고 필요한 협력을 제공하겠다고 함.”-->}}</ref> 5월 29일, 김일성은 [[스티코프]]에게 4월 모스크바 회담시 합의된 무기와 기술이 이미 대부분 북한에 도착했음을 통보하였다. 이 통보에서, 또한, 김일성은 새로 창설된 사단들이 6월말까지 준비 완료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북한군 참모장이 [[바실리예프]] 장군과 함께 마련한 남침공격 계획을 북한지도부가 승인하였고, 군조직 문제는 6월 1일까지 끝내기로 했다. 북한 군은 6월까지 완전한 전투준비 태세를 갖추게 된다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6월말 이후는 북한군의 전투준비에 관한 정보가 남쪽에 입수될 수 있으며 7월에는 장마가 시작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6월 8~10일께 집결지역으로의 병력이동을 시작할 것이이라고 보고되었으며, 김일성과 면담 뒤 스티코프는시발이라 하며 바실리예프 장군 및 [[포스트니코프]] 장군과 의견을 교환했다. 그들은 7월에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시의적절하나 일기관계로 6월로 변경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300289104008&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3&officeId=00028&pageNo=4&printNo=1961&publishType=00010 |제목 =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3> |출판사 =한겨레신문 |날짜 = 1994-07-23 |쪽 = 5 |인용문 = <!-- ◇ 대남 공격계획 수립 △ 5.29=김일성은 슈티코프에게 4월 모스크바회담시 합의된 무기와 기술이 이미 대부분 북한에 도착했음을 통보. 김일성은 새로 창설된 사단들이 6월말까지 준비 완료될 것이라고 말함.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북한군 참모장이 바실리예프 장군과 함께 마련한 남침공격 계획을 북한지도부가 승인. 군조직 문제는 6월 1일까지 끝내기로 함. 북한군은 6월까지 완전한 전투준비 태세를 갖추게 됨. 김일성은 6월말 이후는 북한군의 전투준비에 관한 정보가 남쪽에 입수될 수 있으며 7월에는 장마가 시작된다는 점을 지적. 6월8~10일께 집결지역으로의 병력이동을 시작할 것임. 김일성과 면담 뒤 슈티코프는 바실리예프 장군 및 포스트니코프 장군과 의견을 교환. 그들은 7월에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시의적절하나 일기관계로 6월로 변경할 수 밖에 없다고 함.”-->}}</ref> 6월 11일, 대한민국은 통일민주조국전선이 제의한 평화통일안을 거부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300289104008&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3&officeId=00028&pageNo=4&printNo=1961&publishType=00010 |제목 =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3> |출판사 =한겨레신문 |날짜 = 1994-07-23 |쪽 = 5 |인용문 = <!-- ◇ 김일성-마오쩌둥 회담 △ 6.11=남한은 통일민주조국전선이 제의한 평화통일안을 거부.”-->}}</ref>
 
이 통보에서, 또한, 김일성은 새로 창설된 사단들이 6월말까지 준비 완료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북한군 참모장이 바실리예프 장군과 함께 마련한 남침공격 계획을 북한지도부가 승인하였고, 군조직 문제는 6월 1일까지 끝내기로 했다. 북한 군은 6월까지 완전한 전투준비 태세를 갖추게 된다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6월말 이후는 북한군의 전투준비에 관한 정보가 남쪽에 입수될 수 있으며 7월에는 장마가 시작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6월 8~10일께 집결지역으로의 병력이동을 시작할 것이이라고 보고되었으며, 김일성과 면담 뒤 스티코프는시발이라 하며 바실리예프 장군 및 포스트니코프 장군과 의견을 교환했다. 그들은 7월에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시의적절하나 일기관계로 6월로 변경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300289104008&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3&officeId=00028&pageNo=4&printNo=1961&publishType=00010 |제목 =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3> |출판사 =한겨레신문 |날짜 = 1994-07-23 |쪽 = 5 |인용문 = <!-- ◇ 대남 공격계획 수립 △ 5.29=김일성은 슈티코프에게 4월 모스크바회담시 합의된 무기와 기술이 이미 대부분 북한에 도착했음을 통보. 김일성은 새로 창설된 사단들이 6월말까지 준비 완료될 것이라고 말함.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북한군 참모장이 바실리예프 장군과 함께 마련한 남침공격 계획을 북한지도부가 승인. 군조직 문제는 6월 1일까지 끝내기로 함. 북한군은 6월까지 완전한 전투준비 태세를 갖추게 됨. 김일성은 6월말 이후는 북한군의 전투준비에 관한 정보가 남쪽에 입수될 수 있으며 7월에는 장마가 시작된다는 점을 지적. 6월8~10일께 집결지역으로의 병력이동을 시작할 것임. 김일성과 면담 뒤 슈티코프는 바실리예프 장군 및 포스트니코프 장군과 의견을 교환. 그들은 7월에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시의적절하나 일기관계로 6월로 변경할 수 밖에 없다고 함.”-->}}</ref> 6월 11일, 대한민국은 통일민주조국전선이 제의한 평화통일안을 거부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300289104008&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3&officeId=00028&pageNo=4&printNo=1961&publishType=00010 |제목 =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3> |출판사 =한겨레신문 |날짜 = 1994-07-23 |쪽 = 5 |인용문 = <!-- ◇ 김일성-마오쩌둥 회담 △ 6.11=남한은 통일민주조국전선이 제의한 평화통일안을 거부.”-->}}</ref>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쟁 준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