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1737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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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박지원 연보}}
==== 출생과 어린 시절 ====
박지원은 [[1737년]]([[영조]] 13) [[3월 5일]]([[음력 2월 5일]]) 축시에 [[한양]] 서부(西部) 반송방(盤松坊 : 야동(冶洞그 야동 맞음 그 섹스하규 물고 빨고))에서 지돈녕부사를 지낸 [[노론]]중진 장간공 [[박필균]]의 손자이며, 열상외사(洌上外史) [[박사유]]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머니는 함평이씨(咸平李氏)로 이창원(李昌遠)의 딸이다. 그의 형제들 중에는 2남 2녀가 전하는데 위로 형 [[박희원]]과 누나 두 명이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하였다.
 
5대조 박미(朴瀰)의 동생 박의(朴漪)의 아들은 현석 [[박세채]]로 소론의 거물이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서인]] 당원이었으나 [[숙종 (조선)|숙종]] 때 [[노론]]과 [[소론]]이 갈리면서 그의 가문도 노론과 소론으로 당론이 나뉘었고, 박세채는 소론을 선택하였다. 당대인 [[영조]] 때의 거유 성리학자인 여호 [[박필주 (조선)|박필주]]는 그의 재종조부로, 증조할아버지 박태길의 형 박태두의 아들이자 할아버지인 박필균의 사촌이었다. 할아버지 박필주는 지중추부사와 지돈녕부사를 역임한 노론 거물이었지만 당쟁에 뜻을 두지 않고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할아버지 박필균은 당쟁에 초연했고 연암 역시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당쟁에서 거리를 두었다.